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박상하의 한국기업성장史]<39> '중석불 사건', 누가 수백억의 폭리를 취했나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39>1950년대 대표적 정경유착, 중석弗 사건
전쟁통에 중석 팔아 번 금쪽같은 달러, 정치자금으로 증발

-중석 1만5000t 수출하고
-470만 달러 민간상사에 불하
-산업용으로 써야할 돈
-양곡 등 멋대로 수입해 폭리
-주도한 재무부 관리, 출세가도
▲중석불사건으로 인해 1952년 설립된 국영기업 대한중석

▲중석불사건으로 인해 1952년 설립된 국영기업 대한중석

AD
원본보기 아이콘


정치를 하려면 당장 필요로 한 게 돈이다. 이건 비단 어느 시대, 어느 특정 정권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 다름 아닌 돈이다.

한데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는 그런 정경유착이 꽃 피울 절호의 기회였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정부가 기업에 줄 수 있는 특혜가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김경순에 따르면, 1950년대 경제에서는 국가로부터 누가 얼마만큼이나 나눠받는가 하는 것이 기업의 몸집 불리기에 결정적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딴은 그런 이유에서다.
'…더욱이 인플레가 극심한 상황에서 기업가들은 매점매석, 가격인상, 탈세 등과 같은 비합법적 과정을 통해 자본을 축적해 갔다. 국가기구는 경제적 이권에 거의 모두 개입할 수 있었고, 기업을 언제든지 파멸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아 살아나가는, 정치에 유착한 자본가(political capitallist)는 이승만 정권의 수혜자로서 정권을 유지하는 주체 세력이기도 했다. 바로 이렇게 정치자금의 헌납과 경제적 특혜가 곧 상호의존적인 관료ㆍ자유당 과두지배자ㆍ기업가의 정치연합구조를 형성시켰다.'

그러나 이런 연합구조가 밀도를 더해가면서 저질러진 정경유착은 결국 부패 사건을 낳기 마련이었다. 1950년대 대표적인 정경유착이 이른바 '중석불(重石弗) 사건'이었다.

당시 중석(텅스텐 원석)은 우리 나라의 주요 외화 획득 자원이었다. 강철보다 단단한 중석은 탱크와 같은 군수 제조의 핵심 광물이었다. 중국이 공산화되고 말면서 중석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미국은 '52년 3월 '한미중석협정'을 맺고 2년 동안 중석 1만5000t을 미국에 수출하기로 했다.

한데도 당시에는 달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던 시기였다. 때문에 무역회사들이 이용할 수 있는 달러는 중석불, 종교불, 암달러, 원조불 등이 고작이었다. 중석불이란 앞서 얘기한 것과 같이 중석을 수출해 획득한 달러를 일컬었는데 이 중석불은 자유롭게 쓰지 못하도록 규정해 놓고 있었다. 주로 기계, 선박, 화물 자동차 등 산업 부흥 자재의 수입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그 용도를 제한했다. 종교불은 기독교 선교 및 전시 구호, 교회사업 등을 위해 외국에서 보내온 달러였다.

한데 아직은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2년 7월의 어느 무더운 날이었다. 부산세관이 갑자기 농림부 산하 보세창고를 덮쳐 시중에 범람하고 있는 밀가루를 압수하고 미진상사, 신한산업, 영동기업 등 3개 무역회사의 장부를 압수해갔다. 부산세관은 또 보세창고의 출고를 일체 중지시켰다. 이것이 곧 중석불 사건의 발단이었다. 이어 서상권 법무부장관의 사건 내용 발표가 뒤따랐다.

'정부는 농사철을 앞두고 비료와 식량을 긴급 도입하기 위한 중석불과 정부 보유불 등 합계 470만달러를 민간상사에 불하했다. 국무회의는 이 외화로 비료와 양곡을 도입해 농림부가 지정하는 가격으로 지정된 지역의 농민과 노무자들에게 배급하기로 의결했다. 그러나 업자는 도입한 물자를 임의로 시중에 유출시켜 엄청난 폭리를 본 것인 바 이는 폭리취체령(군정법령 제19호)과 양곡관리법 위반이므로 미진상사(이연재), 남선무역(김원규), 영동기업(최점석), 신한산업(강한욱) 등을 기소했다. 이에 대해서는 공개 재판이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은 정부가 보유불을 6000대 1의 공정 환율(시중 시세는 1만2000대 1)로 불하하되 밀가루 9940t과 비료 1만1368t을 도입하게 해 민간업자들로 하여금 자유판매토록 한 것인데 결국 무역업자들이 3만대 1의 폭리를 취한 것이었다. 무려 5배가 남는 장사였다. 350만 달러에 달하는 중석 수출불로 수입한 쌀, 밀가루, 비료를 자유 판매하여 얻은 부당이익은 이 사건에 직접 관계된 사람의 말을 빌어도 44억원, 일반적인 추산은 200억원, 야당은 500억원의 폭리를 취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중석불 사건은 부산 정치파동 직전에 불거진 사건이었다. 대통령 이승만을 재선시키기 위해 헌법을 뜯어고쳐서라도 대통령선거 제도를 국회에서 뽑는 간접선거가 아닌 대국민 직접선거제로 바꾸려는 무리수를 두기 시작하면서 빚어진 정치 파동이었다. 그러려면 우선 막대한 정치자금부터 마련해야 했고 정권의 금고 역할은 당연히 재무부가 맡아야 했다.

그런 중차대한 임무(?)를 띠고 새로이 임명된 재무부장관 백두진은 농촌을 주목했다. 농촌에서는 비료가 모자라고 피난지 부산에서는 식량 부족에 허덕였다. 그렇다고 비료와 양곡을 들여오자니 규정상 정부의 보유불이나 중석을 수출해서 얻은 중석불은 결코 사용할 수가 없게 돼 있었다.

한데도 무역상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수입을 하려고 혈안이 돼 있었고 정부 보유불이나 중석불을 호시탐탐 넘보던 터였다. 중석불만 불하받으면 쉽사리 큰돈을 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규정에 가로막혀 있자 '51년 세밑에 은행 보유불 사용은 액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대통령이 인가하고 책임지도록 새로운 규정을 만들었다. 이젠 대통령이 승낙만 하면 어떠한 달러도 마음대로 돌려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대도 아직 남은 게 있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있으니 합당한 명분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누군가 그럴싸한 아이디어를 냈다. '중석불을 벌어들이려면 중석을 많이 캐내야 한다. 중석을 많이 캐내려면 노동자들을 잘 먹여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명분이었다.

마침내 '52년 3월 대한중석에 노동자들을 위한 양곡 도입용으로 중석불 20만 달러를 불하했다.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일단 그렇게 명분이 통하자 그 다음부터는 아이들의 미끄럼타기였다.

뒤이어 특정 무역회사에도 알게 모르게 외화가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정부의 불하 방법은 외화 담당자조차 모르는 사이에 낙하산식으로 이뤄졌다. 남선무역, 미진상사 , 영동기업, 신한산업, 보금행, 고려흥업(김의규) 등 14개 기업에 중석불 350만 달러가, 삼호무역(정재호), 경북과물조합 등 10개 기업에 정부 보유불 120만 달러 등 총 470만 달러가 감쪽같이 불하됐다.

이처럼 외화를 은밀히 불하받은 무역회사들은 미국과 일본에서 들여온 밀가루 한 포대에 무려 3만~4만원씩의 폭리를 취했다. 외국에서 비료와 양곡을 사들일 땐 반드시 정부가 제시한 공정 가격으로 판매하도록 규정돼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공정 가격은 그저 콧방귀였을 따름이다. 놀랍게도 거래된 전량이 자유 판매돼 막대한 부당이익을 얻었던 것이다.

뒤늦게야 외화가 새어나가 폭리를 취한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국회는, 중석불 배정 과정에서 국회의 동의 절차가 생략되었기 때문에 위법임을 내세우며 정치 쟁점화 했다. 그리하여 1952년 7월 정부 보유불 및 중석불에 의한 수입 양곡 비료 기타 물자 취급 사항 조사에 관한 건을 가결하고, 12명으로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조사 결과 영동기업 등 4개 무역회사가 중석불로 비료와 밀가루를 들여와 이미 대부분 자유 처분을 하여 수백억 원의 폭리를 취한 사실이 밝혀졌다. 아울러 이 안건을 다룬 국무회의가 3차에 걸쳐 결의를 번복하는 등 여러 부당한 처사가 있었다는 것도 밝혀내면서 정부 불신임안까지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달러 배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재무부는 가만 내버려둔 채 애꿎은 농림부만 희생양으로 삼았다. 또한 민간 업자들의 폭리 행위에 대해서만 기소하는 선에서 이 사건을 일단락 지으려 들었다.

때문에 검찰은 마지못해 손을 대긴 했다. 미진상사 사장 이연재와 상무 김원평, 남선무역 사장 김원규와 무역부장 김광규, 영동기업 사장 최점석과 전무 박문수, 그리고 신한산업 사장 강한욱 등을 기소하고 나섰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담당 검사조차 재판정에 입회하지 않으면서 공판이 연기되는 해프닝까지 벌어지기조차 했다.

그 뿐 아니었다. 검찰은 기소 내용에서 이미 4개 기업이 40억원의 폭리를 누렸다고 밝히고 있으면서도, 따라서 당시로선 초유의 사건이었음에도 모두 불구속으로 기소하면서 세간에 의혹을 뿌렸다.

겉으로 보기엔 법원도 자기 할 바를 다한 것처럼 보였다.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피고인들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하지만 구속영장이 집행된 것은 단 한 건도 없었다.

당시 부산지검 검사장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들을 당장 구속 수사하라며 경남도경 수사과에 엄중 시달했다고 밝혔으나, 경남도경 수사과는 눈감고 아옹이었다. 그럴 때 피고인들은 부산 인근의 바닷가에서 한가로이 바다낚시를 즐기고 있었다니. 가히 권력의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정부의 후속 조치 또한 제 마음대로였다. 민간 기업에 중석불을 은밀히 불하한 주무 부처는 재무부였고, 농림부는 그저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석불로 밀가루와 비료 등을 수입하도록 추천했을 따름이다.

한데도 인사태풍은 재무부가 아닌 농림부로 향했다. 농림부장관 함인섭, 차관 원용석, 양정국장 박 아무개 등에게 중석불 사건의 책임을 물어 줄줄이 경질되었다. 반면에 주무 부처의 재무부장관 백두진, 차관 박희현, 이재국장 최도용, 이재과장 황호영 등은 초유의 파동 속에서도 거뜬히 살아남았을 뿐더러, 곧이어 줄줄이 승진하는 기쁨(?)을 누렸다. 재무부장관 백두진은 일약 국무총리로 발탁됐다.

그러나 수백억원씩이나 배불렸다는 중석불의 정경유착은 그들 모두에게 횡재를 안겨준 것만은 아니었다. 사건의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떨어지면서 그들 내부에서도 일부 상처가 없지만은 않았다. 중석불 사건이 들통 나 법정으로 비화하기 전에 밀가루와 비료를 재빨리 수입하여 처분한 기업들은 돈방석에 앉았으나, 어쩌다 한발 늦었던 미진상사와 고려흥업 같은 경우에는 큰 타격을 입어야만 했다.

중석불을 은밀히 불하받으면서 정치자금으로 뭉칫돈이 빠져나간데 이어, 중석불로 수입한 물자를 미처 처분하지도 못한 채 압류당하고 말면서, 이미 선납한 정치자금과 불하금만 몽땅 날리고야 만 셈이었다. 한발 늦었던 미진상사와 고려흥업은 이 중석불 사건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해 결국 몰락의 수순을 밟게 됐던 것이다.

특히 중석불의 주역이자 당대 무역업계를 이끌었던 미진상사 사장 이연재는, 일찍이 양산(洋傘)을 시작으로 무역업계에선 꽤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일본 오사카에서 삼양양산㈜을 설립하고 양산제조 수출입을 하다 부산으로 거점을 옮겨온 건 해방 전이었다.

한데 국내 양산을 독점해오고 있던 일본 기업들이 가만있지를 않았다. 반대가 거세어지자 국내 판매는 하지 않고 해외 수출을 조건으로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다행히 양산 수출은 순탄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어서 통제가 엄한 때인데도 연간 50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올릴 정도였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하면서 양산시장마저 무너지고 말자 이연재는 변신을 서둘렀다. 성공의 길을 걷게 해주었던 양산 제조를 미련 없이 접는 대신, 미진상사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대일 수출품목으로 인기를 끌었던 천초(한천의 원료)를 비롯해 수산물 따위를 취급했는데, 한국전쟁이 터졌을 땐 이미 무역업으로 상당한 기반을 다진 뒤였다.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오면서 군수물자 취급 기관으로 승리공사를 발족하자 그가 건물 한 동을 선뜻 기증하고 나서면서 힘을 보탰는가하면 자신의 사무실 일부를 피난 내려온 무역협회에 내어주기도 했다. 이같이 씩씩하기만 하던 미진상사가 중석불 90만 달러를 은밀히 불하받으면서부터 몰락의 길을 피할 수 없게 되고 만 것이다.

이연재는 흥아타이어 재건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재기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과다한 부채 때문에 기울어가는 사세를 되돌리지 못했다. 운도 지지리 따라주지 않았다. 재기에 성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예컨대 ICA(국제협조처)로부터 자금 48만 달러를 확보해 놓았건만 중석불 사건이 발목을 잡았다.

이연재는 5ㆍ16 군사쿠데타 이후 한때 숨통이 트이는가 싶었다. 하지만 끝내 은행 부채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흥아타이어는 은행 관리 기업으로 전락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어쨌든 중석불 사건은 당시 수백억의 폭리가 오간, 정부 수립 이후 첫 번째 정경유착 사건이었다. 더욱이 그 다음달 8월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자금 조성과 결코 무관치 않았다는 게, 후일 드러난 자유당의 정치자금 조달 방식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전쟁 중인 상황에서 그걸 직접 다 밝혀내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박상하 작가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이슈 PICK

  • 6년 만에 솔로 데뷔…(여자)아이들 우기, 앨범 선주문 50만장 "편파방송으로 명예훼손" 어트랙트, SBS '그알' 제작진 고소 강릉 해안도로에 정체모를 빨간색 외제차…"여기서 사진 찍으라고?"

    #국내이슈

  • "죽음이 아니라 자유 위한 것"…전신마비 변호사 페루서 첫 안락사 "푸바오 잘 지내요" 영상 또 공개…공식 데뷔 빨라지나 대학 나온 미모의 26세 女 "돼지 키우며 월 114만원 벌지만 행복"

    #해외이슈

  • [포토] 정교한 3D 프린팅의 세계 [포토] '그날의 기억' [이미지 다이어리] 그곳에 목련이 필 줄 알았다.

    #포토PICK

  • "쓰임새는 고객이 정한다" 현대차가 제시하는 미래 상용차 미리보니 매끈한 뒤태로 600㎞ 달린다…쿠페형 폴스타4 6월 출시 마지막 V10 내연기관 람보르기니…'우라칸STJ' 출시

    #CAR라이프

  • [뉴스속 용어]뉴스페이스 신호탄, '초소형 군집위성' [뉴스속 용어]日 정치인 '야스쿠니신사' 집단 참배…한·중 항의 [뉴스속 용어]'비흡연 세대 법'으로 들끓는 영국 사회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