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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17>객주의 후예들, 일제에 맞서 '조선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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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상하가 쓰는 재계 通史
<17>전국 운송업자들의 고향이 된 '조운'


조선운송의 사보 표지(왼쪽)와 회계장부

조선운송의 사보 표지(왼쪽)와 회계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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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물류업의 개척기를 돌아볼 때 '조선미창'만을 가지고는 설명이 다 되지 않는다. 지난주에 살펴본 조선미창이 전국의 주요 항구에 건축한 대규모 미곡 창고를 중심으로 미곡의 운송과 보관ㆍ출하 부문의 물류를 개척해나갔다면 '조선운송(이하 조운)'은 전국에 거미줄처럼 깔린 철도역을 중심으로 철도화물의 운송과 출하ㆍ배달 부문의 물류를 개척해나가면서 각기 항구와 철도라는 고유 영역을 구축하며 근대 물류업의 쌍벽을 이뤘다.
그러나 조운의 성장통은 미창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조운의 역사는 그야말로 조선 운송업자들의 끝없는 투쟁과 도전, 협력으로 이뤄진 산통 끝에 탄생했다.

사실 종래의 조선 운송업은 전통적으로 상인들의 숙박과 상품 거래를 중간 도매상인 객주와 여각이 전담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리고 객주와 여각은 상품 운송을 대부분 강과 바다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항구나 나루에 위치하기 마련이었다. 일본의 물류 운송업자가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한 개항 이후에도 한동안 해운과 강운을 중심으로 한 운송체계는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

그러다 1899년 노량진-제물포 구간 32.2km의 경인선 철도가 개통된데 이어 경부선과 경의선의 철도가 잇따라 깔리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동안 해운과 강운을 중심으로 조선의 운송업계를 독점해오다시피한 객주와 여각은 새로운 교통수단에 밀려 쇠퇴하거나 철도 정거장으로 자리를 옮겨 운송업ㆍ위탁판매업ㆍ중개업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분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조선의 운송업계는 철도를 이용한 화물 운송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됐다. 또 강이나 연안을 따라 주로 선박을 통한 근거리 운송과 하역을 업으로 삼던 조선의 운송업자들이 경쟁적으로 철도화물 운송에 뛰어드는 동안 명치유신 이후 자본력을 축적한 일본의 크고 작은 운송회사들이 하나둘 조선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06년 경에는 경부철도와 경의철도의 주요 역이나 중간 역마다 한ㆍ일 운송업자가 상당수 존재했다. 철도기관과의 밀착 관계로 보나 자본의 규모 면에서 일본의 운송업자들이 압도적으로 유리했지만 조선 운송업자들의 활동 또한 만만치 않았다.

헌데 일본은 러일전쟁이 끝나자 1906년부터 경부선과 경의선 등을 국유로 전환한 다음 노선 연장 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1910년 평남선 개통에 이어 1914년에는 호남선과 경원선의 전 구간에서 영업이 시작되면서 조선 각지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혈맥을 이어나갔다. 그 사이 1911년에는 압록강 철교가 준공돼 광활한 만주 벌판으로까지 철도가 뻗어나갔다.

이 같은 조선 철도의 국제화는 당시 정세 변화와 맞물려 조선은 물론이고 동북아 운송업계 전반에 걸쳐 일대 지각변동을 몰고 왔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가 시작되는 시점인 1907년 조선통감부의 비호 아래 일본의 내국통운이 조선에 들어왔다.

내국통운이 한성에 지점을 설치하고 영업을 시작한 직후 통감부는 철도화물 운송취급인 승인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이 승인제도는 내국통운과 일정 규모 이상의 자본력이 있는 일본계 업계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이용됐다.

그 결과 조선의 운송업계는 치열한 경쟁과 대립 구도로 돌입했다. 내국통운 계열 점소의 친목 단체인 통운동맹회와 중소 규모의 일본계 및 조선계 업체들이 연대한 조선운수연합회 사이에 세력 과시와 분규가 끊이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1917년 조선철도의 경영을 만주철도(이하 만철)에 위탁하기로 하자, 운송업계는 또다시 술렁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시작된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는 가운데 그동안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던 운송업체들은 물량 부족과 경쟁에 따른 수지 악화로 고전하고 있었다. 그러자 시장의 혼란을 우려한 만철의 경성관리국은 조선철도승인운송점조합을 결성하고 나섰다.

하지만 일본계 업체들 위주로 계산 업무를 대행해주고 가맹 조건을 까다롭게 하는 등 독점 기관으로서의 전횡을 일삼자 이에 품만을 품은 연합회 소속의 조선계 업체들 또한 1922년 선운동우회를 조직하고 회원 간의 친목 도모와 함께 별도로 계산 업무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변수가 돌발했다. 1923년 들어 일본에서 내국퉁운과 경쟁 관계에 있던 국제운송이 조선에 진출하면서 이제껏 내국통운이 독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조선의 운송업계는 이 두 일본 회사의 세력권으로 갈라져 새로운 대립과 갈등의 늪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러자 1927년 일본계 승인점조합을 중심으로 조선운송업합동유지회를 결성하고 통합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조선계 업체들의 조직체인 선운동우회도 초기에는 격렬하게 반대했으나 점차 통합에 찬성하는 회원 업체들이 늘어나면서 결국 통합에 참여하기로 입장을 정리했다.

한편 이보다 조금 앞서 일본의 내국퉁운과 국제운송은 일본 철도성 주도로 진행된 통합 작업 결과 내국통운이 국제운송을 합병하면서 회사명을 국제통운(주)으로 변경했다. 조선의 운송업계 통합 역시 이 같은 변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국통운으로 조선에 진출한 이래 줄곧 우위를 점유하고 있던 국제통운은 처음부터 통합에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운송업계는 조선계 업체들의 조직체인 선운동우회를 중심을 한 통합파와 일본계 국제통운이 이끄는 반대파 진영으로 갈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했다.

보다 못한 철도국이 긴급 중재에 나선 끝에 국제통운이 최종적으로 이탈을 선언하자 조선의 운송업 통합은 조선계 운송업체들이 모인 통합파가 주도할 수 있게 됐다. 결국 통합파 진영은 1930년 발기인 총회를 열고 회사 설립 안건을 가결한데 이어 100만원(지금 돈 약 1200억원) 주식 대금 전액을 불입하면서 회사의 경영진을 전원 선임했다. 4년여의 우여곡절 끝에 조선운송업계를 대표하는 '조선운송(조운)'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조운은 회사를 설립한 이후 통합에 찬성하는 군소 업체들을 지속적으로 흡수 합병한 결과 1930년에는 전국 주요 역의 41개 직할점에서 일제히 영업을 개시할 수 있었다. 철도국에서도 조선 전체 운송업자들의 70% 이상인 1328개 업체가 회사 설립에 참가한 사실을 들어 업계에선 유일하게 조운을 국유철도 지정 운송 취급인으로 지명했다.

이를 계기로 조운은 역 구내에서의 화물 작업과 집배, 소화물 배달, 소구급 및 톤급 화물의 운반, 작업 인력 공급 등 대부분의 운송 업무를 대행할 수 있게 됐다. 철도국 또한 철도 영업 창고의 경영을 조운에 위탁하고 화물자동차를 제공하는 한편 조운의 임직원에게는 무임 승차증을 제공하는 등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철도국의 이 같은 조치에 일본의 국제통운은 위기감을 느꼈다. 국제통운은 계열 점소의 친목단체인 통운동맹회와 선운협회 및 조선운송동맹회 등을 움직여 운송혁신대회를 여는 등 집단행동을 벌이는 한편, 각지의 하주들을 대상으로 운임 경쟁과 화물 쟁탈 등을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 진영의 경쟁과 암투는 시간이 갈수록 쌍방 모두에게 고통만을 안겨줬다. 그런 와중에 화물 짐표를 허위로 발급하는 등 범법 행위를 저지르는 업체들이 나타나 시장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정책 결정권자인 철도국과 자금줄을 쥔 조선은행이 중재에 나서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결국 1931년 그동안 통합에 반대해오던 일본의 국제통운을 비롯해 조선운송 3사의 대표들이 통합에 합의하면서 분쟁은 일단락됐다. 국제통운 등이 조운에 합류하면서 조선의 운송업은 마침내 일원화 시대로 접어들었다.

더욱이 이듬해부터는 동북아 경제도 오랜 불황을 넘어 때맞춰 활황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과 만주에 진출하기 시작한 일본의 공업 자본이 증가하면서 조선의 운송업계 역시 전에 없는 호황기에 들어섰다.

1932년에는 만주국이 수립되면서 조선을 거쳐 만주에 이르는 최단거리 노선의 확보가 일본 정부의 최우선 전략 과제로 떠오르면서 다시금 운송업계가 요동쳤다. 일본은 만주 신징(新京)에서 함경도 회령을 거쳐 나진에 이르는 루트에 이어, 나진에서 청진ㆍ원산을 지나 경성에 이르는 철로를 개통했다. 이 철도가 개통되면서 원산과 청진을 거쳐 만주로 이동하는 물동량이 급증하자 조운에 합류한 일본의 국제통운과 만주 다롄(大連)에 본사를 둔 일본의 국제운수가 이 황금노선에 서로 눈독을 들이고 나섰다.

새로운 황금 노선을 놓고 1년 가까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두 회사의 이해 관계는 결국 국제운수가 청진 이북의 철도 영업권을 갖는 대신 조선의 운송 시장에서 빠져나가고 국제통운은 해운 업무 일체를 조운에 양도하면서 조운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으로 최종 타결됐다.

이처럼 국제통운의 해운 업무가 새로 편입되면서 해상 운송 물량이 급증하자 조운은 1934년 해운 부서를 신설하고 해운 점소도 15개나 확장하는 등 조선 전역에서 운송 일관 체제를 빠른 속도로 구축해 나갔다.

이후 벌어진 중일전쟁으로 국내 경기는 인플레가 날로 확대돼 갔다. 하지만 운송업계 만은 오히려 활기를 띠었다. 조선 쌀의 일본 수출과 만주에서 생산되는 잡곡 수입을 비롯해 관공서 및 군부대 물자 수송 등으로 전에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 결과 1931년 637만t이던 육운 취급량이 1938년에는 1527만t으로 크게 증가했고 총 7만9636t이던 직영 트럭의 취급 톤수도 무려 25만t을 훌쩍 넘어섰다.

1939년부터는 조운의 영업 기반이 조금씩 더 북쪽 지방으로 뻗어나갔다. 당시 신의주에서 다사도항으로 이어지는 압록강 하구의 넓은 지역에 수많은 공장들이 줄지어 세워졌다. 곧 완공될 수풍발전소의 전력과 압록강을 이용해 군수품을 생산할 공장들이었다. 조운은 신의주와 다사도항에 지점을 신설하고 새로운 화물을 확보하는 한편, 부산과 베이징 간 대륙 기차 운행 개시를 계기로 중국 내륙의 주요 도시를 도착지로 하는 철도화물 영업에도 활발하게 진출했다.

1940년 조운은 회사 설립 10주년을 맞아 창립 당시 4과 10계였던 본사 조직이 8과 26계로 대폭 확장됐다. 또 해운 점소를 포함한 지점과 출장소 등 현장 인프라도 43개에서 169개로 크게 늘어나면서 어느덧 조선을 넘어 동북아 굴지의 물류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같은 해 연말부터 철도와 자동차의 연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철도국의 방침에 따라 전국 철도역을 매개로 이뤄지고 있던 화물자동차 사업을 조운 주도로 통합하는 작업이 추진됐다. 이 작업은 전국 22개 주요 역 소재지에 난립해 있던 소규모 운송회사 372개를 통합해 1역에 1사 기준으로 합동 운송회사를 설립하고 나머지 작은 역 소재지에 있는 827개 군소 회사는 조운이 직접 인수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런 결과 전국 22개 주요 역에는 합동 운송회사 1개와 조운이 1역 2사 체제로 영업을 하고 나머지 작은 역에서는 조운 1사가 전담해서 영업을 하는 형태가 갖춰졌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22개의 합동 운송회사는 조운이 모두 50% 이상을 투자한 자회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업 현장에서는 원활한 업무 협조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관계는 1941년 하반기부터 철도국의 조정에 의해 항만 운송과 하역 작업에 관련된 회사들을 통합하는 작업이 추진되면서 비로소 해소될 수 있었다. 또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조운은 1942년 함경도 흥남에 있는 서호진수산운수의 운송 부문을 포함해 22개 합동 운송회사 전체를 흡수 합병하고 업무와 인력도 그대로 인수함으로써 육상 운송업계를 완전히 통일할 수 있게 됐다.

항만의 운송업 역시 전시의 일원화 정책에서 예외일 순 없었다. 1941년 항만운송업 통제령이 시행되기 전에는 전국 항만의 하역과 운송업이 자유업으로 저마다 간판을 내걸 수가 있었다. 그러나 1942년부터 항운업에 대한 당국의 통제 방침이 구체화되면서 전국 주요 10개 항구(부산, 인천, 목포, 군산, 마산, 포항, 해주, 진남포, 원산, 성진)에는 조운이 50% 이상 투자한 항운(주)이 일시에 설립됐다.

하지만 조운의 자회사로 설립된 이들 항운 역시 철도역의 합동 운송회사와 같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그러자 1943년 이들 10개 항운을 해산하고 그 업무와 임직원 모두를 신설 합병 형식으로 조운에 흡수하면서 조선해륙운수로 회사명을 바꿨다. 그러면서 해방 직전 조운은 항만 하역과 연안 해운을 비롯해 철도화물과 공로 운송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역의 육운과 해운 모두를 천하 통일한 종합 물류회사로 급부상했다. 회사의 규모 또한 자본금 3850만원(지금 돈 약 4조6200억원)에 종업원 수 5만명에 달하는, 당시 국내 어느 기업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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