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정준영 기자]#. "꽃병 깨뜨린 사람만 조용히 손들어. 솔직하게 나오면 이번 한 번만큼은 봐 준다"


책상 위에 무릎 꿇은 채 눈을 감은 학생들. 그 사이를 누비며 선생님이 잔잔히 타이르자 다음날 교실엔 전날 깨진 꽃병 대신 새 꽃병이 놓여있다. 체벌이 금지된 오늘날엔 접할 수 없는 풍경이지만 학창시절 왕왕 겪곤 했던 일이다. 교실에서 무언가 사라지거나 망가지는 등 문제가 생길 때마다 누구도 "제가 했어요"라며 나서지 않는한 선생님은 여지없이 "책상 위로 올라가서 무릎 꿇고 눈 감아"라고 지시하시곤 했던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누구든 잘못을 저지르고 난 뒤엔 벌 받는 게 두렵다. 뚜렷한 증거가 없어 제 입으로 털어놓지 않는 이상 발각될 위험이 줄어들면 더더욱 숨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잘못으로 인한 결과가 있는데도 이를 치유하지 않고 놓아두면 결국 사회는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상호불신으로 나아간다. 이를 막고자 저지른 잘못에 비해 다소 가볍게 벌하게 되더라도 잘못을 시인하게 만드는 것. 바로 이것이 오늘 지식의 주인공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이다.


◆영미법서 출발… 부패방지법 등을 통해 국내도 일부 도입중
흔히 '유죄 답변 거래', '유죄 협상 제도'로도 불리우는 플리바게닝이란 피고가 유죄를 인정하거나 혹은 타인에 대해 증언을 하는 대가로 검찰이 형을 낮추거나, 죄 자체를 보다 가벼운 항목으로 다루기로 거래하는 것을 의미하는 제도다. 한국엔 없는 이 제도는 배심원평결제와 더불어 미국의 형사재판 절차가 가진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유무죄를 다투는 정식 재판절차는 배심원이 평결에 나서게 되지만, 검사와 피고측 변호사가 유죄 인정을 조건으로 형량협상에 성공하면 항소 등의 절차 없이 바로 판사가 형량을 구형하게 된다. 미국의 경우 형사사건의 95% 가량이 플리바게닝을 통해 해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협상문화를 바탕 삼아 배심재판을 택하고 있는 영미법 계통 국가 위주로 발달한 제도이지만, 성문법을 바탕으로 법관이 이를 해석ㆍ적용하도록 정하고 있는 대륙법 계통의 사법체제를 지닌 국가들에서도 일부 제한적으로 도입해 활용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도 제도 자체를 법으로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법원이 당사자 사이의 협상을 인정하고 이를 존중해야한다고 본 사례가 있어 플리바게닝 자체를 부정하고 있지는 않다. 독일법의 영향을 많이 받은 우리나라도 플리바게닝 자체를 법에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기능을 하는 법 규정이 일부 마련되어 있다. 자수하면 형을 줄이거나 받지 않을 수 있도록 한 형법이나, 내부고발자 등 부패행위를 자진신고하면 신고자 본인이 연루되어 있더라도 마찬가지로 형을 가볍게 해주거나 아예 받지 않도록 한 '부패방지법' 등이 그렇다.


사실 플리바게닝은 이미 우리에게 제법 친숙하게 다가와 있다. 로스트, 프리즌브레이크 등 국내서도 소위 '미드'가 유행하며 검사와 변호사가 피고인을 두고 형량을 협상하거나, 범인이 공범에 대해 털어놓고 유유히 법정 밖으로 걸어나가는 장면 등은 플리바게닝 덕분에 연출이 가능한 장면이다.


마찬가지로 플리바게닝을 소재로 삼은 영화가 국내 상영관을 통해 소개된 적도 있다. 지난 2009년 3D영화 '아바타'광풍에 휩쓸려 다소 초라히 막을 내리긴 했지만, 아내와 딸을 무참히 살해한 범인들이 검사와의 사법거래로 풀려나자 복수에 나서는 주인공을 다룬 영화 '모범시민'도 그 중 하나다.


◆'죄를 사고판다' 부정인식 극복 과제… 죄 감면 위해 악용되는 사례 막아야
 '이처럼 주변에서 종종 접해왔으면서도 선뜻 이해하기 힘든 것은 우리 법엔 없는 제도인 탓도 있지만, '죄를 사고판다'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한 탓이 크다. 계약과 협상, 소송에 친숙한 영미법계와 달리 우리 사회문화는 현실에서 빚어지는 소소한 일까지 법원으로 가져가지도 않을뿐더러 '죄'를 가지고 흥정한다는 것 자체를 용인하기 힘들다.


사실 플리바게닝이 등장한 배경 자체도 이와 무관치 않다. 범인이 드러나지 않고 사회 뒤로 숨어드는 것을 막는 것 못지않게 소송이 일상화되고 여러 배심원에 의해 재판이 진행되는 만큼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보완책으로서의 기능도 함께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이 부실하게 수사했다', '특별검사제를 도입해 끝까지 파헤쳐라' 같은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오는 우리나라에서 "시간도 오래 걸리고 돈도 많이 들어가니 그냥 협상해서 빨리 끝냅시다"같은 태도는 아직 피부에 와닿기 힘들다.


실제로 이와 유사한 제도가 국내서 논란거리가 된 적도 있다. 플리바게닝과 비슷한 것으로 '리니언시'(Leniency), 즉 '자진신고감면'이란 제도는 우리나라에서도 법으로 정해 활용되고 있다. 이 제도는 담합행위를 자진해서 신고하면 과징금을 깎아주는 제도로 공정거래위원회에 담합 사실을 신고한 순서대로 1순위는 전액, 2순위 50%, 3순위는 30%순으로 각각 과징금을 줄여서 내도록 하고 있다.


삼성, 교보, 대한 등 보험업계 '빅3'가 개인보험 이율 담합을 주도하고서도 오히려 가장 먼저 신고해 세금을 피한다거나, LPG가격 담합을 주도한 국내 시장점유율 1ㆍ2위 SK에너지ㆍ가스가 공정위의 조사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보란 듯 가장 먼저 신고해 과징금 2500억원을 감면받는 등. 심지어 1위 업체가 먼저 신고한 사실이 전해지면 서로 2,3위를 차지하려 다툰 경우마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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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검찰이 주저없이 성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한명숙 전 국무총리 사건도 상당 부분 맞닿아 있다. 우리 형법은 플리바게닝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만, 재판부는 한 전 총리에 대한 무죄를 선고하기 앞서 법정에서 진술을 완전히 뒤집었던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의 검찰진술에 대해 이미 분양사기로 옥살이 중이던 한씨가 추가 기소되는 것을 피하려했거나, 검찰의 주선으로 조사과정에서 만남이 이뤄진 남모씨가 가석방 등의 이익을 언급하며 수사에 협력하라고 권한 사정 등을 두고 사법거래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낸 바 있다. 남씨는 당시 한씨의 분양사기 관련 자료를 대부분 갖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주 슈프림팀 이센스 등 홍대 힙합뮤지션들이 대마초를 피우다 대거 경찰에 적발됐다. 이 중 19명이 입건됐고 판매책으로 움직인 김모씨는 검찰에 송치됐다. 혹 우리나라에서도 플리바게닝이 적용될지 궁금하다면 이 사건의 향후를 지켜보자. 누군가 유독 가볍게 처벌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제보자'가 아닐까 하고.


정준영 기자 foxf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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