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전쟁 새 국면… 경주G20 회의 관전포인트는
[아시아경제 박연미 기자] 지난 주말을 기점으로 환율전쟁이 새 국면을 맞았다. 마주보고 달리던 G2(미국과 중국) 사이에 변화가 감지된다. 미국이 위안화 절상에 속도를 낸 중국의 조치를 인정한다며 한 발 물러섰다. 덕분에 중국은 점진적 위안화 절상론에 명분을 얻었다.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한국도 달라졌다. 적극적인 중재자 역을 자임하며 수세(守勢)에서 공세 (攻勢)로 입장을 틀었다.
기류 변화에 속이 타는 건 일본이다. 외교 관례를 무시하면서까지 엔고 이슈화에 나섰지만, 이러다간 서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목소리 낼 틈도 없이 환율 전쟁 휴전(休戰)이 선언될 수도 있다. 명분과 실리를 주고 받은 G2간 물밑 협상이 타결되면 일본의 외침은 멋쩍은 뒷북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번 주 열리는 경주 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회의는 이처럼 급변하는 환율 전세(戰勢)를 파악할 수 있는 장이 될 전망이다.
▲실리챙긴 美
티모시 가이트너 미 재무장관은 15일 "중국이 지난 9월 이후 위안화 절상에 속도를 낸 점을 인정한다"며 "이런 과정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 다. 중국의 성의 표시를 인정하는 발언이다.
미국 정부는 같은 날 발표하기로 했던 하반기 환율정책보고서 발표도 서울 G20 정상회의 뒤로 미뤘다. 위안화 절상에 소극적인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할 것인지를 두고 관심이 높았던 보고서다. 미 재무부는 반 년에 한 번 주요 교역국의 환율 정책에 대한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하지만, 전반기에도 중국 이슈로 4월이던 시한을 한참 넘겨 7월에야 보고서를 내놨다.
미 정부의 이런 유화(宥和) 제스쳐는 미국이 환율전쟁을 극단적으로 몰아갈 의사가 없음을 보여준다. 원하는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국이 단계적 위안화 절상에 나서면 미국은 실리를 챙길 수 있다. 더욱이 중국이 미 국채의 최대 고객이라는 점, 이란과 북한 핵문제 등 긴밀히 협의할 현안이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과 영영 등질 수는 없는 사이다. 치킨게임(한 쪽이 양보하지 않으면 양쪽 모두 파국으로 치닫는 경쟁)으로 흘러가는 듯했던 환율전쟁을 적정선에서 마무리할 여지를 남겨둔 셈이다.
▲명분얻은 中
미국의 속도조절에 중국도 명분을 얻었다. '위안화, 절상하되 점진적으로' 중국의 입장은 한결 같다. 미국의 용인에 따라 중국은 내부 충격을 완충하면서 위안화 가치를 올릴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됐다.
종전 중국의 입장은 단호했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지난 달 22일 미 버락 오 바마 대통령과의 회담에 앞서 "위안화 환율을 급속하게 절상할 근거가 전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튿날 미·중 우호단체들의 환영 만찬 연설에서도 그는 "미국의 무역 적자는 위안화 환율 탓이 아니라 (미국 경제의)투자와 저축 등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원자바오 총리는 이어 이 달 4일 8차 ASEM(아시아유럽정상회의) 개막식 기조연설에 나서 "아시아 개도국들이 서구 지배의 국제 금융기구에서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했고, 6일에는 중·유럽 비즈니스 포럼 강연을 통해 "위안화 의 급격한 절상은 전 세계에 재앙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의 변화에 중국도 꼿꼿하던 자세를 바꾸는 분위기다. 중국 신화통신은 지난 16일 왕치산(王岐山) 부총리가 하루 전 가이트너 재무장관과 통화해 양국 경제관계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고 전했다. 통신은 특히 "후진타오 주석의 특별대표인 왕 부총리가 버락 오마바 대통령의 특별대표인 가이트너 장관과 약속에 따라 전화 통화를 했다"고 밝혀 위안화 환율 등 현안을 두고 양국 정상이 간접적적으로 의견을 교환했음을 시사했다.
▲중재 팔걷은 韓
상황을 관망하던 한국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적극적인 중재역에 나설 뜻을 분명히 했다. 서울 G20 정상회의를 '남의 잔치'로 만들지는 않겠다는 다짐이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15일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열린 대외경제장관회의에 참석해 "최근 세계 경제는 선진국의 경기 회복 지연과 유럽 재정위기의 장기화 가능성, 환율 변동성 확대로 불확실성이 지속되고 있다"며 "각 국이 경기 회복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수출에 더욱 의존하게 되면서 환율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고 보호무역주의로 비화할 조짐마저 나타나고 있다"고 경계했다.
윤 장관은 이어 "우리나라가 G20 정상회의 의장국으로 2년 전 워싱턴 회의에서 스탠드스틸(stand still·투자와 무역에 현 수준 이상의 새로운 장벽을 치지 말자는 약속) 을 주도했듯 앞으로도 보호무역주의 움직임에 단호히 대처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이런 의지를 담아 이 달 경주 G20재무장관 회의에서 의견을 모은 뒤 11월 서울 G20 정상회의를 통해 2003년 '두바이 합의' 수준에 버금가는 환율 합의를 주도한다는 계획이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국제기구와 G20 안팎 신흥국 어느 쪽도 환율 갈등이 장기화되는 것을 원치 않아 한국에 힘이 실릴 것으로 보는 시각도 적잖다.
▲속타는 日
급변하는 판세를 보며 가장 속이 탈 나라는 일본이다. 외교 관례에 어긋나는 직설화법까지 동원해 중국과 한국을 자극하고 있지만,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면 자칫 환율 문제는 공식 테이블에 올려놓기도 전 거인 사이의 합의로 마무리 될 가능성이 있어서다.
엔고 해결을 위해 사활을 건 일본은 최근 중국뿐 아니라 한국을 흠집내는 데 한창이다. 일본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와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재무상은 지난 13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참석해 작정한듯 중국과 한국의 외환정책을 성토했다.
간 총리는 "특정국이 자기 나라의 통화 가치만을 인위적으로 낮게 유도하는 것은 G20의 협력 정신에 어긋난다. 한국과 중국도 공통의 룰 속에서 책임 있는 행동을 취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다 재무상 역시 "한국은 원화 환율에 수시로 개입하고 있고, 중국도 지난 6월 외환제도 개선을 통해 위안화의 유연화 노선을 택했으나 걸음은 지체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10월 말 경주에서 열리는 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회의에서 한국은 의장국으로서 그 역할을 엄하게 추궁당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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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설화(舌禍)는 정부 외환당국자가 일본 정부에 직접 전화를 걸어 항의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받은 것으로 알려져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이튿날 노다 재무상이 다시 "한국의 항의 내용을 알지 못한다"고 말해 재점화됐다.
정부는 일본이 의도적인 자극으로 환율 문제를 이슈화하면서 엔고의 돌파구를 찾으려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원화 대량 매입으로 원화 절상을 유도하려 한 정황이 있다는 보도도 속속 나온다. 하지만 유화 무드를 타고 있는 G2의 분위기에다 의장국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겠다는 한국의 선전포고가 나온 마당이어서 일본의 뜻대로 상황이 흘러갈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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