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 등에 올라탄 천하장사가 의기양양하게 경기장을 돌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인기몰이를 했던 씨름판의 퇴색이야말로, 잘 나갈 때 미리 대비를 못해서 경쟁력을 잃은 스포츠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씨름선수들이 침체의 원인을 씨름판에서만 찾으면 길이 안 보입니다. 역대 천하장사들이 샅바차림으로 청도의 소싸움 모래판에 서보지 않고 위기를 외면한다면, 우승한 황소를 천하장사들이 등에다 떠메고 경기장을 도는 수모(?)를 당할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몇 판의 소싸움을 관전해보니 사람이 소와의 흥행경쟁에서는 필패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겉으론 소싸움이 머리와 뿔과 목의 힘으로만 싸우는 듯 보이지만, 실은 1t여의 육중한 몸을 지탱해주는 앞다리가 승부를 결정지었습니다. 바닥에 쓰러지면 패하게 되는 인간의 격투기 대부분이 후들거리는 다리에서 먼저 그 조짐을 알 수 있듯이.
유동적인 모래판에서 균형을 잡으며 공격과 수비를 하고, 급회전도 가능하게 하려면 회전축인 앞다리의 힘이 필수입니다. 소가 계단을 올라가기는 잘 하지만 계단을 내려가지 못한다는 것은, 무게중심을 앞다리가 잡는다는 것의 다른 표현입니다. 뒷다리보다 앞다리의 족발가격이 비싼 이유는 싸움소의 그날 일진을 언제나 앞다리가 총괄하기 때문이죠.
인구 4만5000명에 불과한 경북 청도군 외곽의 야산자락. 무려 1만명을 수용할 전천후 상설 소싸움경기장(천장개폐식 돔형, 지름 30m 모래판)이 세계최초로 완공됐다는 뉴스 하나만으로도 바야흐로 토종 한우의 위상회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박사들의 엉덩이는 벌써 여름을 건너 9월에 가 있겠지요.
그곳은 소싸움을 즐기면서 돈을 베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거대한 오프라인 게임장이자 외국인의 색다른 관광코스로 변모할 것입니다. 개장을 5개월여 앞두고 지난주 열렸던 5일간의 시범경기는 전국대회에서 8강 이상 올랐던 쟁쟁한 소들만 골라 132마리가 출전했답니다. 1억5000여만원의 상금을 걸고 벌이는 토너먼트 방식이었죠.
점심시간을 막 넘긴 금요일이지만 각종 승용차들이 논밭과 차도까지 촘촘히 들어차 있어 시범경기라기엔 너무 뜨거운 열기였습니다. 몇 대의 TV카메라들과 모래판에 포커스를 맞춘 사진기들의 즐비한 삼각대로 왕중왕을 가리는 큰 시합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원형 링에 들어서자마자 자세를 낮춘 투우들은, 양 앞발로 번갈아 모래를 뒤로 쓸며 전의부터 과시했습니다. 반대편에서 상대 소가 들어서면 일단 머리를 일합(一合)으로 충돌한 후 기세를 살피는데, 1000kg이 넘는 중량급에선 첫 번째 박치기만으로도 충격을 받고 내빼는 경우도 있다하니 그야말로 박 터지는 소싸움입니다.
대가리가 터지는 고통을 참아내야만 주인에게 거액의 상금을 안겨줄 수 있는 싸움소의 운명. 뿔에 찢긴 이마로 내빼는 패한 소의 몰아쉬는 거친 숨소리에, 침을 묻혀가며 상금액을 확인하는 승리한 소 주인의 벌건 얼굴이 상상되었습니다. 서울 외곽 국도변에서 가끔 눈에 띄었던 ‘소머리국밥’이란 잔인한(?) 간판은 누가 작명했는지….
투우장은 샅바를 잡고 숨을 고르는 씨름선수들의 진지한 모래판과 너무나 닮았습니다. 씨름판이 양손으로 꽉 잡은 샅바를 중심으로 체중이동이 되듯이, 싸움소들 역시 양쪽 뿔이 서로 걸린 채 샅바처럼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며 시종 상대의 허를 노리는 숨 가쁜 긴장의 연속이었지요.
영화 ‘워낭소리’에서 보았던 선하디 선한 눈빛은 어느새 스페인 투우들의 핏발 선 눈빛으로 변했습니다. 뿔을 감아 치고 돌리면서 격돌이 거듭되면 뿔자위에 선홍색 핏물이 스며 나오지만 생각보다 쉽게 물러서지 않는 끈기를 가졌습니다.
어떤 소의 주인은 쉼 없이 공격을 독려하고 기술을 주문하는가 하면, 어떤 소는 주인이 묵묵히 주위를 돌며 지켜보기만 해도 알아서 잘 싸우고 있었습니다. 누가 소를 두고 ‘미련하다’고 했으며, ‘우이독경(牛耳讀經)’이란 속담을 만들었는지 정중하게 사과성명을 내야할 현장이었습니다.
단판 승부마다 이기면 500만원, 지면 50만원의 상금이 걸려있어서 그럴까요. 소의 주인들 역시 좀처럼 후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싸움은 사람이 맞붙어 치고받는 어떤 격투기보다 신사적으로 진행되는 경기임을 느꼈습니다.
첫째, 몇 번이고 입을 벌리며 혀를 내밀면서도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합니다.
둘째, 도저히 안 된다고 생각되면 미련 없이 등을 돌릴 줄도 압니다. 그건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고 바둑판에 돌을 내려놓는 프로 바둑기사들의 용기와 비교됩니다.
셋째, 결코 패한 상대를 끝까지 핍박하거나 잘난 척하고 하늘 향해 울부짖지 않는 매너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패배를 받아들인 후 돌아서는 상대를 바짝 따라붙는 보폭이 공격적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얼른 보면 상대를 더 공격할 의사처럼 보이지만, 뿔을 세운 각도나 얼굴을 치켜들고 따르는 자세로 보나 이미 상대를 인정하는 화평의 제스처였습니다.
거친 호흡의 콧바람을 패자의 꽁무니에 내뿜으며 잠시 추격하는 모습은, 마치 손이 없는 싸움소가 상대를 따라가서 엉덩이를 두드려주며 ‘잘 싸웠다’ 라고 격려하는 듯한 우정(牛情)의 몸짓이었습니다.
앞선 소는 다음 기회에 보자는 표정으로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을뿐더러, 뒤따르는 소도 관중들에게 패자를 겁박할 의사가 없음을 알려주려는 투우들만의 세리머니로 보였습니다. 마치 박지성이 한 골을 넣고 그라운드를 질주하며 환호하는 관중을 향해 점프를 하는 것처럼….
한번 붙여놓은 싸움소는 이기든 지든 간에 승패를 가리지 않고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돈이 걸려있다고 해서 절대로 조작할 수 있는 성질의 시합이 아닌 점이 소싸움의 또 다른 매력이라 할 수 있겠죠. 주인도 함부로 말릴 수 없다는 의미에서 ‘황소고집’이란 말이 생겼나 봅니다.
패색이 짙은 소는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며 허연 침을 흘립니다. 그렇게 버티다가 정 힘이 부치면 오줌도 싸고 변도 쏟아집니다.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했으면 황소가 그런 추한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인간이 황소들에게 참으로 몹쓸 짓을 시키는 존재임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명예의 전당’을 둘러보니 땅콩, 안창, 비호, 범이. 번개, 태풍, 역도산 등 낯설지 않은 전사들의 전적과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지요. 아무리 잘 싸워도 결국은 코에 고삐가 끼어져 끌려 나가는 당당한 승리 소들을 보면서, 왜소한 체격의 인간이 만물의 영장임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소싸움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 마리가 머리를 맞대고 골똘하게 생각하며 밀고당기는 우시장의 오래된 볼거리였습니다. 적어도 7살은 되어야 출전할 수 있고 말귀도 알아듣고 승부욕도 생긴다고 하니, 현역으로 불과 5~6년 싸우다가 은퇴하는 짧은 牛生입니다.
일제 식민지 시절, 조선 땅에서 수탈해간 한우가 물경 600만두가 넘었다고 합니다. 고기는 일본인의 뱃속으로 가죽은 일본군의 군화가 되었겠죠. 그렇게 씨를 말린 가운데서도 살아남은 한우들의 투박하고 당당한 풍모가 끈질긴 토종DNA로 부활하고 있습니다.
싸움소는 생식을 금하고 화식(火食)을 시킨다고 하는 걸로 보아, 초식동물의 온순함을 제거해 야수의 본성을 기르기 위함이겠죠. 황소들의 두뇌 게임에 조련사들의 전략적인 코치가 가미되는 박진감 넘치는 토종경기. 그 싸움소들의 결연한 눈동자와 뒤태를 보고나면, 소싸움의 매력에 마음과 지갑을 여는 중독자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날 것이란 전망을 감히 해봅니다.
청도는 홍수나 태풍, 가뭄 등의 큰 재난이 얼씬거리지 못하는 천혜의 땅이라고 합니다. 벼가 쓰러져 있어도 일으킬 생각조차 안 하는 농가가 많을 만큼 쌀농사는 수익으로 여기지 않는 농촌. 70노인도 하루 5만~6만원 일거리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느긋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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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없는 감을 다른 지역에다 심으면 기어이 씨가 생겨난다는 특유의 토양. 고추만 심어서도 한해 1억원이상 수익을 올리는 농가가 여럿 된다는데 왜 다들 각박한 서울 주위로만 기를 쓰고 올라오는지.
싸움소처럼 머리를 맞대고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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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우 시사평론가 pdik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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