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민 시인의 진도의 선홍빛들- 유배와 낙조<2>

다시 만난 진도



괜한 기우였다. 진도대교로 들어서면서 느낀 진도는 이십여년전보다 오히려 더 아늑하고 담담하면서도 인상적이고 순하고 연하면서도 뚜렷하며 나지막하면서도 크고 긴 ‘섬’이었다. 진도대교로 뭍과 연결된 지금이 오히려 더 ‘섬’ 같았다. ‘고립과 격리로서의 섬’이 아닌 ‘숨이 트일만큼의 간격과 비켜나있음을 받쳐주는 묵묵한 내면의 미학을 갖춘 곳으로서의 섬’ 말이다. 소박한 휴식과 여유의 별채 같으면서도 타고난 품향이 느껴지는 후원 같은 섬이었다. 안심스러웠고 기뻤다. 무엇을 쓰든 내가 쓴 것 이상의 분위기를 가진 곳이니까.

진도대교 밑 푸른 바닷물에는 유독 빠르고 거친 물살을 보이는 소용돌이 바닷길 ‘울돌목’이 있다. ‘소리를 내어 우는 바다길목’을 뜻하는 그 울돌목에서 정유재란때의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배로 330여척의 왜선을 무찔렀다고 한다.


이른바 명량대첩에서의 대승이다. 그것을 기려 최근에 개방된 서울의 광화문 광장 이순신 동상앞 분수 이름은 12척의 배에서 12를, 23전승에서 23을 딴 12.23분수다. 하지만 12척이란 배의 숫자가 틀리다, 23전 전승도 과장된 거다, 결정적으로 12.23이 하필 일본 왕의 생일과 같다,는 주장들로 이름을 바꿔야한다는 의견도 분분하다.


자연속에서 사는 것도 울분만 아니라면 기꺼이 견딜만 하지 않았을까

내가 진도대교의 울돌목이나 이순신동상 앞에서 생각한 것은 배와 승전의 숫자도 분수 이름도 아니었다. ‘난중일기’에 나오는 활쏘기에 대한 기록들이었다. 일기를 보면 그는 활 쏘기 연습을 거의 날마다 했다. 날마다 활을 몇순 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중 어느 날은 이렇게 상세하게 그 기록을 적어놓기도 했다.


‘임진년 3월 28일.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활 열순을 쏘았는데 다섯순은 모조리 다 맞고 두순은 네 번 맞고 세순은 세 번 맞았다.’



1순은 5발. 따라서 명중률을 계산해보면 64%가량이 된다. 절반을 약간 넘는, 아주 높지는 않은 명중률이다. 이순신 장군을 나와 다를 바 없이 숨쉬고 살았던 한 인간의 모습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은 내겐 백전백승보다 64%의 완벽치 않은 명중률이다.


진도대교를 건너면 진도를 닮은 허수아비와 해바라기와 도시에서는 사라지고 없는 고추장 된장독들로 만든 커다란 화분들이 나온다. 그 사이사이엔 금세라도 수저들고 고추장을 뜨러 나오는 아낙네가 보일 것 같은 낮은 집들이 나온다. 또 그 사이론 인적이 많지 않은 시골길들이 나온다. 좋다. 진도안에 있을 유명한 명승지나 관광지보다 사실 이런 곳을 그냥 지나가는 게 더 아름다운 여행이다. 거기다 산간마을 같이 포옥 들어가고 감싸인 느낌의 마을이다 싶으면 어느 덧 수평선을 가진 바다가 그곳이 바다위 섬이었음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이런 곳이라면 유배의 삶이 힘겹지만은 않았을 듯도 하다. 더욱이 조선시대에 벼슬을 하던 문신관료들은 전부 다 일종의 문인들 아니었던가. 시끄러운 한양을 벗어나 이만한 자연속에서 사는 것도 울분만 아니라면 기꺼이 견딜만 하지 않았을까. 소설가 김훈선생은 그의 저서 ‘원형의 섬’ 속 ‘진도의 유배자’편에 썼다.


‘고려 중기에서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50여명의 왕족과 선비들이 진도에 유배되었다. 아마도 진도로 유배된 선비들은 제주도나 흑산도나 삼수갑산이나 북청으로 유배된 선비들에 비할진대 복받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진도의 포근한 산하는 외지인들에게도 타향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여러 유배지들 중에서 진도는 가장 복된 땅이었을 것이다....(중략)...


진도의 산하는 사람을 찌를 듯이 달겨들지 않고 사람을 짓밟듯이 우뚝하지 않고 사람을 가두듯이 협착하지 않다. 진도의 풍광은 수려하고도 편안하다. 진도 산하의 이 평화는 유배자들의 정서와 예술 속으로 무리 없이 녹아 들어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진도로 유배온 정치범들은 아마도 함경도나 제주도로 유배간 정치범들보다 훨씬 덜 처절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잠깐 딴 얘기지만 이 부분을 읽은 것은 진도를 다녀와서였다. 그런데 ‘외지인들에게도 타향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란 글귀에서 깜짝 놀랐다. 외람된 얘기지만 진도에 대한 나만의 메모중에 ‘고향이 없다고 생각되는 도시사람들은 진도를 고향 삼으라’라는 메모가 있었던 것이다. 어떤 장소에 대해 당대의 최고문장가인 분과 비슷한 사유와 단어를 가졌었다는 건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유배자들의 정서와 예술 속으로 무리 없이 녹아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진도든 삼수갑산이든 흑산도든 유배는 결국 다 똑같이 처절하지 않았을까. 유배는 피를 보지 않고 정치적인 경쟁상대의 목을 치는 일이다. 직접 손을 대지 않고 숨을 끊는 일이다. 사약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유배에 처해지는 순간 유배자들은 누구나 똑같은 강도의 죽음을 겪었을 것이다.


그나마 그 강도를 조금이나마 좌우하는 게 있었다면 ‘한양으로부터의 거리’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진도는 제주도 다음 가는 ‘절도안치(絶島安置)’의 극형지였다. 견디기 힘든 최대 벽지의 섬이었던 것이다. 그래선지 진도에선 유배지에선 드물게 탈출사건도 있었다. 1741년 영조시절 유배에 처해있던 박사대(朴師大)가 진도의 부속섬인 접도를 빠져나가고 얼마안가 또 다른 유배자였던 임상악(林象岳) 역시 접도를 탈출했던 것이다. 이 일로 당시의 진도군수는 극심한 문초를 당해야 했었다.


그리고 또 유배의 처절함을 좌우한 것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사형선고에의 울분을 다스리는 개인적인 역량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연이 먼저 그 울분을 다스려주기도 했겠지만 그것 역시 자연을 끌어들여서라도, 거기에 몰두해서라도 울분을 잊고 전환시키고자 했던 개인적인 노력과 역량의 한 결과가 아니었을지.


그런 점에서 조선 중종 시대의 문신이었던 소재 노수신(1515-1590)의 유배지 세월은 각별해보인다. 그는 을사사화로 순천에 유배되었다가 얼마후 다시 더 먼 진도로 옮겨졌다. 이조좌랑이었던 그는 퇴계 이황과 사상논쟁을 위해 서신을 교환하던 대학자기도 했다. 그런 그가 진도 유배지에서 보낸 세월은 거의 20여년이었다. 강산은 두 번 바뀌고 임금은 세 번 바뀐 세월이었다. 그 세월동안 그는 뛰어난 정치인이나 학자들이 유배지에서 그랬듯이 유배지의 원주민들을 교육적으로 계몽하고 교화하려 애썼다.


그 결과 당시 진도에서 행해지던 가장 야만적인 혼례방법을 고쳤다 한다. 당시에는 혼인을 하려는 남자들이 중매가 아닌 힘으로 여염집 처녀들을 강탈하는 풍속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고 있었는데 노수신이 그를 계몽해서 바로 잡은 것이다. 높은 학식과 덕망의 영향력 없이는 가능치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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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덕망의 힘이었는지 노수신은 진도에서의 19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다시금 서울로 불러올려졌다. 그리고 선조의 총애속에서 영의정 자리에까지 올랐다. 20여년만에 다시금 맞이하는 정치적인 해금과 봄이 어땠을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지만 실은 인생도 길다. 인내하다보면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날도 오고, 영원히 계속 될 것 같은 날도 끝난다.


나 어린 시절엔 박정희란 이름이 대통령이 아니라 왕실의 왕인 줄 알았었다. 상징으로 그랬다는 뜻이 아니라 실제로 그 이름과 그 가계만이 영원히 우리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것인 줄 알았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니, 그 충격은 내게 인생이란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움직이기도 하는 유동체란 걸 가장 강하게 심어주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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