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금진 시인의 '화엄사' 기행<3>

화엄사에선 나무들이 경을 읽는다


절 입구에서 만나는 불이문不二門 아래를 지날 때면 마치 한 세계의 문을 닫고 다른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줄기는 이곳과 저곳의 경계를 가르려는 듯 세차다.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줄기는 이곳과 저곳의 경계를 가르려는 듯 세차다

장마 때라서 물은 많고, 그 물에선 온 몸을 깨끗이 씻고 절에 오르라고 긴 죽비를 휘둘러 마구 후려치는 소리 들린다. 일직선으로 뻗어 있지 않고 잔뜩 휘어진 산사의 길은 지리산과 섬진강의 줄기를 닮았다.


이를 테면 곡선의 미학이다. 구불구불한 강의 줄기를 사람의 인생과 비유하는 일은 낡은 발상이지만 나 역시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부드러운 곡선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오래 된 길은 마침내 대나무 숲을 세워놓는다. 대나무 숲에 귀를 기울여 보면 안다. 대나무 숲에 어떤 늙은 거인이 살고 있어서 혼잣말로 연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어쩌면 그 대나무 숲으로는 달밤을 가득 실은 기차가 드나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고 쓴 서정춘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츠츠츠츠, 격음화현상을 일으키는 대나무들의 언어를 듣다보면 마침내 세상 모든 사람들도 대나무의 한 종족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곡선의 길은 바람에 들려오는 하나의 리듬이 된다.


화엄사를 감싸고 있는 산은 둥지 모양을 하고 있다. 화엄사는 그 안에 폭 담긴 알처럼 아직 채 열리지 않은 낙원을 꿈꾸고 있다. 처음 절을 창건한 이의 숭고한 뜻과 탑을 돌면서 기원을 올리던 이름 없는 이들의 꿈이 여전히 소중하게 담겨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동백나무들이 빼곡하다. 동백나무는 원래 사찰의 화재를 막기 위한 방화림防火林 구실을 한다고 한다. 동백꽃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을 알 것이다. 동백꽃은 본디 불덩이였을 것이다. 눈밭에 피어있는 꽃잎은 눈으로 보기만 해도 온기가 전해져 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동백나무를 사찰의 방화림으로 삼았다는 것은 불로써 불을 막는다는 뜻일 것이다.


동백숲 옆에 인간의 백팔번뇌계단이 있다

각황전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백팔 계단이 나온다. 백팔이란 수는 고뇌의 상징이다. 그 고뇌와 번뇌의 계단에 바로 동백나무 숲길이 나 있는 것이다. 동백나무 숲에 들어가면 해가 들지 않아서 순식간에 어둑해지는 것을 느낀다. 말 그대로 번뇌의 숲이 되는 것이다. 모든 무늬들의 경계가 사라지고 하나의 어둠, 하나의 무늬가 된다. 누구든 동백나무 숲에선 동백의 얼굴을 하게 된다.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리면 손바닥마다 동백꽃이 피어날 것이다. 어둠이 피워내는 꽃, 그것이 번뇌를 이기고 해탈한 사람의 표정이 아닐까. 동백숲 옆에 인간의 백팔번뇌계단이 있다. 그 길을 걸어야 인간은 비로소 꽃으로 피어난다

백팔 계단을 다 올라가면 효대孝臺가 나온다. 효대는 화엄사를 창건한 인도의 중, 연기조사와 그의 어머니를 형상화한 탑이 있다. 연기조사는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를 항상 생각하였는데,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찻잔을 바치는 조각상이 바로 연기 조사이며 맞은편에 위치한 조각상이 연기조사의 어머니 상이다. 거기엔 효대에 얽힌 전설만큼이나 오래된 나무가 한 그루 있다. 바로 화엄송華嚴松이다. 수령은 500년. 세월의 풍파를 이기고 살아남은 비장한 느낌마저 준다. 화엄송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 보면 나무줄기가 하늘에 핏줄처럼 뻗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못 다 이룬 혁명가의 열정 같기도 하고, 오래 묵은 깨달음을 세상에 전파하려고 우뚝 선 선사의 따스한 손금 같기도 하다.



나는 젊어서 일찍 출가한 당숙을 생각했다.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던가, 물 대접에 피를 하나 가득 토하고 돌아가셨다는 당숙. 가끔 우리 집에 오셔서 글눈이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께 부적을 써서 벽에 붙여주시던 분. 나는 당숙을 잘 알지 못하나 백팔 개의 천 조각을 기워 만들었다는 그 분의 가사 자락은 여전히 내 기억에서 펄럭이고 있다. 효대 앞에서 만나는 늙은 소나무도 분명 그런 옷을 입고 있었다.



떠돌이들의 노래


천왕문天王門에는 새들이 산다. ‘양비둘기’들이다. 양비둘기는 흔하지 않은 종인데 화엄사에서 수십 마리가 무리를 지어 산다. 저녁 무렵, 해가 다 지고 나면 어디를 갔다가 돌아온 것인지 천왕문 추녀 밑 공포에 비둘기들이 한 마리씩 앉아 있다. 눈에는 피로의 빛이 역력하며, 빠진 깃털은 바닥으로 날아 내린다. 도시에서 만났다면 영락없는 노숙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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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말씀으로는 배설물을 아무데나 떨어뜨려 꽤나 절을 더럽게 하는 모양인데, 나는 오히려 비둘기들이 불쌍해 보였다. 저들에게도 어떤 거룩한 불심佛心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거지꼴을 하고서라도 절에 와서 깃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면 새들의 운명이란 건 참으로 고달프다. 막막한 허공을 쏘다니면서 먹이를 구한다.


비라도 내리면 꼼짝없이 비를 맞아야 하며 밤이 깊어도 새들은 눈을 뜨고 자는 법이다. 텅 비어 있음의 실체를 몸으로 견디면서 그 사이를 헤엄치듯 날아다니는 자의 고독은 얼마나 큰 비애인가. 나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충주, 원주, 제천, 영월, 홍천, 춘천, 대전, 용인, 광주 등등에 살면서도 그 안에서 수차례 이사를 다녔었다. 이 세상 어딘가엔 ‘아비阿飛’라는 발이 없는 새가 있어서 내려앉을 곳도 없이 공중을 떠돈다는데, 새의 상징이란 언제나 그런 방랑의 이미지를 수반한다. 화엄사에서 만나는 양비둘기들이여, 안다, 나도 너희들의 때 묻은 발톱이 깨지고 벗겨진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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