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하 전 주영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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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은 익숙한 냄새와 빛으로 가득하다. 커피 향과 펼쳐진 책, 그리고 텔레비전 방송이 나오고 있다. 그 가운데 거대한 코끼리 한 마리가 서 있다. 거대한 형상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움찔하다가 이내 눈을 감고 투명 코끼리로 치부한다. 현실이 아니길 바라는 회피 심리의 결과다.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혹 말하는 이가 있으면 이상한 눈으로 그 사람을 쳐다본다. 그 사이 코끼리는 꼬리를 흔들며 유리잔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육중한 걸음마다 마루가 뻐걱거린다. 책장이 넘어지고 방 전체가 무너질 때까지 사람들은 코끼리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창밖의 날씨를 얘기하고 사소한 대화를 이어간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정면으로 말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방 안의 코끼리'다. 작은 불씨가 바람을 만나면 산불이 되듯, 무시된 경고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낳는다.

우리 내부에도 코끼리는 늘 있었다. 우리는 과거의 실수에서 배워왔다고 말하지만 실수는 반복된다. 경고 신호는 늘 존재했고 우리는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보려고 하지 않았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된 '왕(王)'자 손바닥은 비합리적 정치의 상징이었고 그것을 용인한 것은 집단적 무감각이었다. 우리는 웃으며 넘겼고 불편함을 농담으로 치환했다. 그 순간부터 방 안의 코끼리는 더 자랐고 결국 우리나라를 혼란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


우리는 위험을 감지하면서도 지나친다. 불편함을 피하려는 회피기제, 즉각적인 비용을 피하려는 계산, 시간이 저절로 해결할 것이라는 착각 등 그 이유는 복합적이다. 그러나 지나침의 대가는 혹독하다. 보라, 미국의 매력과 지도력이 어떻게 파괴되고 있는지, 우리나라의 보수가 어떻게 붕괴하고 있는지, 균형과 견제의 기반이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지. 한번 무너진 신뢰와 질서는 회복하기 어렵고 균열된 제도는 붕괴의 길로 접어든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방 안에는 코끼리가 있고 외면이라는 양식을 먹으면서 자라고 있다. 코끼리는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작은 위험 신호들이 쌓여서 만들어진다.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게 작았을 것이고, 눈에 띌 정도가 됐는데도 질문을 미루고 불편한 사실에 눈을 감을 때마다 자란다. 그리고 더 이상 방 안에 갇혀있지 않고 난동을 부리며 쑥대밭을 만들고야 만다.


우리들의 방에는 여러 마리의 코끼리가 있다. 보수의 자업자득으로 보이는 괴멸과 사법개혁이 견제와 균형의 구조를 흔드는 코끼리가 아닌가. 대북 유화적 조치가 지정학적 상황과 변화하는 동맹관계의 현실 속에서 리스크를 불러올 코끼리는 아닌가. 집단적 성찰이 긴요하다. 코끼리가 우리의 소중한 방을 부수기 전에 리스크 평가가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


코끼리는 우리 내면의 거대한 진실이기도 하다. 플라톤의 동굴에서 그림자에 속아 진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익숙하고 편안한 그림자에 머문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때로는 고통스럽고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통제 불능 전에 경보를 울리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시간조차 없다. 방 안의 코끼리를 향해 지금 경보를 울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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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하 전 주영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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