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최초 그래미 본상 후보
대중음악 언어 확장 진행중
한국어, 걸림돌 아닌 디딤돌

[아경의 창] 로제 '아파트'를 한국어로 노래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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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중음악 시상식 그래미 어워드는 폐쇄성과 보수성으로 인해 계속 비판을 받았다. 1959년 시작된 그래미의 역사에서 비영어권 국가의 아티스트가 본상 부문을 수상한 경우는 손에 꼽는다. 초기에는 자국 아티스트에도 차별이 심했다. 로큰롤은 청소년에 해로운 악마의 음악이라며 배척했고, 흑인 교회 음악 가스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소울은 푸대접을 받았다. 힙합이 주류 장르로 등극하기 전 흑인은 후보에 올라도 백인과의 경쟁에서 밀려났다. 낯선 언어의 동양인 수상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미는 자신의 색깔이 흰색이라는 사실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았다.


2020년 그래미 레코딩 아카데미 최초의 여성 임원이 임기를 반년도 못 채우고 해고되면서 민낯이 드러났다. 여성 임원은 투표 과정에서 특정 후보를 선택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며 뇌물이 오가야 후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듬해 BTS가 본상 부문은 아니지만 3년 연속 후보에 올랐다.

그리고 2025년, 블랙핑크의 로제가 인기 스타 브루노 마스와 함께 부른 ‘아파트’(APT.)가 그래미 주요 부문인 ‘올해의 노래’, ‘올해의 레코드’, ‘베스트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 후보에 올랐다. 넷플릭스 최고 흥행작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삽입곡 ‘골든’(Golden)도 ‘올해의 노래’ 후보로 호명됐다. 이 곡은 ‘비주얼 미디어 최고의 곡’과 ‘최고의 리믹스 레코딩’ 등 5개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K팝과 아이돌의 외피를 입은 두 곡이 서로 경쟁하는 모양새다.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궁금증. 로제가 ‘아파트’를 한국어로 노래했다면 그래미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을까. ‘골든’을 한국어로 불렀다면 미국 빌보드와 영국 오피셜 싱글차트 동시 석권이 가능했을까. 대답은 간단치 않다. 세계 무대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자리매김한 K팝은 항상 위기와 기회에 직면해 있다. 글로벌 음악 시장은 영어권 중심으로 작동한다. 특히 북미 지역은 방송 편성이나 플레이리스트 알고리즘에서 영어 가사는 절대적이다. 한국어 곡은 노출 기회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 K팝을 매력적인 공산품처럼 만들어온 기획사의 근심이다.


그러나 최근 글로벌 음악 시장은 다양성과 정체성에 관한 관심이 급격히 커지고 있다. 과거처럼 영어 가사로 노래해야 해외 음악팬이 더 친숙하게 느끼는 시대가 지나고 있다. 아티스트가 자신과 가장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언어로 노래할 때 팬들은 진정성을 느끼고, 한국어를 해석하고 공유하는 팬덤 문화가 더해져 K팝만의 독자적 생태계를 형성한다. 한국어의 독특한 음절 구조는 K팝 리듬감과 잘 어울린다. 후렴에 주로 등장하는 영어와 한국어의 하이브리드 구조는 많은 히트곡에서 검증된 방식이기도 하다. 과거 장벽이었던 언어가 오히려 팬층 확장의 기회로 변하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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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 K팝, 지속 가능한 K팝의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들어야 한다. K팝이 스스로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순간, 세계화가 아니라 자기 축소의 모습이 될까 우려스럽다. 결국 한국어가 가진 정체성을 지키며 글로벌 시장의 수요를 어떻게 조율하느냐의 문제가 될 것이다. 대중음악에서 다양한 언어의 확장은 이미 진행형이다. 팝의 여왕 마돈나가 “시대를 이끄는 진정한 뮤지션”이라고 극찬한 로살리아의 최근 앨범 ‘럭스’(Lux)가 좋은 사례다. 로살리아는 지금까지 모국어인 스페인어로 노래했다. 영어로 가사를 쓰지 않고도 미국과 유럽에서 톱스타로 성장했다. 네 번째 앨범인 ‘럭스’는 스페인어와 영어, 우크라이나어, 아랍어, 일본어와 중국어까지 등장한다.

로제는 ‘아파트’를 영어로 노래했다. 내년 2월 1일 그래미 시상식 무대에서 로제는 한국어로, 브루노 마스는 영어로 ‘아파트’를 노래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임훈구 디지털콘텐츠매니징에디터 keygrip@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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