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 편집자주


문학과 현실의 역동적 관계를 섬세한 감식안과 날렵한 필치로 묘파해온 문학평론가 강경석이 등단 18년 만에 펴내는 첫 평론집이다. 87년 민주화 이후의 한국문학을 큰 테두리로 삼았으며 세월호참사와 촛불혁명 전후로 문학의 현장에서 발화된 다양하고 개성적인 목소리들을 분석한 27편의 글을 묶었다. 2000년대 초부터 문학이 사회적으로 무용하거나 현실 앞에서 무력할 뿐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졌는데, 저자는 이러한 공허한 논의를 단숨에 뛰어넘어 우리 시대 문학에서 새로운 현실을 향한 움직임을 생생한 감각으로 읽어낸다.

[책 한 모금] 리얼리티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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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끝내 해명하기 어려운 삶의 심연들을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리키곤 한다. 그것은 자주, 아니, 대개는 시인의 손을 떠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상업주의의 산물인 광고 문구조차 이따금 그 뿌리를 초과하는 아름다움과 위로의 힘을 발한다. 언어의 주술은 무서운 것이다. 그것이 문학 안에 그 스스로가 초래한 자립적 질서가 있다는 믿음을 뒷받침해온 근거일지 모른다. 문학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무차별적으로 위로하는 아편인 듯 여기는 감각 또한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위험을 견제하는 다른 힘의 존재가 그래서 필요해진다. ‘자율성’은 어떤 형이상학적 전제로부터 연역되어 시작(詩作)의 어느 순간 임하는 주술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고통스러운 현실이 부과하는 제약들에 맞서는 싸움 가운데 이따금 성취되는 무엇일 것이다. 앞에서 길게 살펴본 것처럼 타율성을 제대로 통과하지 않은 자율성이 식민성을 낳는다. 「민족문학의 정전 형성과 3ㆍ1운동」 부분

리얼리티와 마주한다는 것은 낡은 세계가 은폐하려 드는 진실과 정직하게 대면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때로 고통에 접속하는 절차를 요구하지만 문학에 주어진 소명은 언제나 현실적 고통의 단순한 해소에 있다기보다는 그 고통의 국면을 생생한 현재의 체험으로 지속하게 만드는 데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 ‘다른 세상’을 여는 힘이 바로 거기에서 나오며 바로 그것이 이 글에서 말하는 ‘민중적인 것’의 요체이기도 하다. ‘다른 세상’에 대한 믿음은 그 무류성(無謬性)에 대한 맹신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가운데 만들어지는 오류까지도 현실의 엄연한 일부로 의연히 감당할 수 있고 극복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온다. 일체의 무기력과 체념, 그리고 냉소와 혐오는 투항의 사전절차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라앉고 있는, 우리가 마땅히 건져 올려야 할 세계가 언제나 여기에 있었고 또한 여전히 있다. 「리얼리티 재장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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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 재장전 | 강경석 저자(글) | 창비 | 428쪽 | 2만16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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