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종식의 주역,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사망…"새 시대를 연 지도자"(종합)
러시아·동구권서는 '배신자'로 평가
개혁개방 정책에도 결국 소련 경제 붕괴
한국과 첫 정상회담…관계 정상화 본격화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전세계 냉전 갈등 종식과 옛 소련의 해체 등 현대사의 대격변을 이끌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91세로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30일(현지시간) 러시아 타스통신에 따르면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입원 중이던 모스크바 중앙 임상병원은 이날 성명을 통해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오랜 투병 끝에 이날 저녁 사망했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 2015년 이후 오랫동안 중증질환에 시달려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1985년 당시 소련 서기장에 취임해 권좌에 오른 이후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양대 주요 정책으로 내세우며 소련의 개혁과 민주화를 이끌었다. 그의 정책은 동구권에 거대한 변혁을 몰고 왔으며,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동·서 냉전구도의 종식으로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방-러, 엇갈린 평가…평화의 지도자 VS 배신자
1987년 12월8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서기장(왼쪽)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 서명하고 있다. 미국과 소련간 핵군축 합의의 기본이 된 INF 조약은 냉전 종식을 앞당긴 성과로 평가받는다. 워싱턴DC(미국)= 로이터·연합뉴스
원본보기 아이콘국제사회에서는 전세계 평화와 대통합을 이끌어낸 지도자로 그를 기억하는 반면 러시아와 동구권 내에서는 극도의 혼란을 몰고 온 ‘배신자’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전세계 지도자들은 잇달아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도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냉전의 평화적 종식을 위해 그 어떤 사람보다 많은 일을 했다"며 애도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도 "그는 신뢰받고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냉전을 끝내고 철의 장막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며 "그것은 자유로운 유럽을 위한 길을 열었고, 그 유산을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라고 조의를 표했다.
특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여론이 비등해진 상황이어서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공적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시기에 소련 개방을 위한 그의 지침없는 헌신은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며 "그가 보여준 용기와 진심을 항상 존경했다"고 말했다.
외신들도 그의 사망소식을 속보로 타전하며 냉전 종식의 공로를 높게 평가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냉전을 종식하고 소비에트 연방 해체를 이끌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보도했다.
국제사회로부터 냉전 종식의 공로를 인정받고 있지만, 러시아와 옛 소련권 국가들에서는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을 소련 붕괴와 동구권의 대혼란을 불러일으킨 배신자라는 평가도 함께 존재한다. 무리한 개혁개방 정책으로 소련의 경제난을 가중시켰고, 소련 해체 이후 발생한 정국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 생존시 그와 각을 세웠던 푸틴 대통령은 크렘린궁 대변인을 통해 짧은 애도를 표하는데 그쳤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푸틴 대통령은 고르바초프의 사망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 푸틴 대통령은 고르바초프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조의를 표하는 전문을 보낼 것"이라고 전했다.
푸틴 대통령은 소련의 붕괴에 대해 "세기의 가장 큰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고르바초프 재단은 푸틴 대통령의 집권 이후 그의 장기독재를 끊임없이 비판해왔다.
◆개혁·개방에도 소련 경제 붕괴
1989년 10월8일 동독 창설 40주년을 맞아 동베를린을 방문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서기장(왼쪽)과 에리히 호네커 동독 서기장(오른쪽)이 볼에 키스를 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다. 소련의 지원과 동독정권의 공고함을 상징하는 사진이었지만, 불과 한달 뒤에 발생한 베를린 장벽 붕괴 사건으로 동독정권은 무너지고 서독과 동독은 통일됐다. 베를린(독일)= EPA·연합뉴스
원본보기 아이콘집권 이전의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초고속 출세로 지도자가 된 유능한 관료로 유명했다. 그는 당대 명문이던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부에 진학한 직후인 1952년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이후 우수한 중앙관료로 인정받아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49세 때인 1980년, 최연소로 소련 공산당 최고 의결기구인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이 됐고 이후 5년 만에 최고 지도자인 소련 서기장에 올랐다.
그는 집권 이후 경제난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미국과의 체제경쟁을 끝내기 위해 서방국가들과 적극적인 외교에 나섰다. 1989년 2월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종결시키고, 그해 11월 발생한 베를린 장벽 붕괴를 수용해 동·서독의 통일이 이뤄졌다. 1990년에는 미국과의 군축협정을 이끌어낸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집권 이후 심화된 경제난을 막진 못했다. 영국 BBC에 따르면 그의 집권 이후 소련 경제는 40% 이상 위축됐으며, 경제난이 발생한 주된 원인은 소련의 재정과 경제를 지탱하던 국제유가의 폭락이었다. 국제유가는 그가 집권한 직후인 1985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70% 가까이 급락했다.
자원에 의존하는 러시아경제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없이 실시된 개혁(페레스트로이카)·개방(글라스노스트) 정책은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기존 공산주의체제하의 계획경제체제에서 자본주의체제로 이행한 국영기업들은 공산당에 의해 억눌려있던 주요 생필품과 제품가격을 일제히 현실화한다는 명목으로 끌어올렸다. 소련 당국도 재정압박이 심화되자 대규모로 화폐량을 늘리면서 경제 악순환이 이어졌다.
결국 소련의 해체가 진행되던 1991년 8월, 보수파의 쿠데타로 권력기반을 상실한 고르바초프는 4개월 뒤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1996년 다시 대선에 출마해 재기를 노렸지만, 불과 0.5%의 지지율을 받았으며 이후 정계활동은 중단했다.
이후 러시아의 주요 진보매체인 노바야가제타를 창간하고, 옛 소련시절 사회과학연구소를 인수해 고르바초프 재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한국과 첫 한·소 정상회담 개최
한편 그는 소련 지도자 중 최초로 한국과 외교 물꼬를 틀며 각별한 관계를 가졌던 지도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 소련의 참가를 결정했으며, 이에따라 동구권 국가 대부분이 서울올림픽에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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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90년 6월 한국과 미수교 상태에서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미국에서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해 12월 노태우 대통령이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해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으며, 이듬해 4월에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제주도에서 정상회담을 가지며 양국간 외교 정상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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