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회 칸영화제(5월17~28일·현지시간) 참석차 지난 5월 프랑스를 다녀온 뒤 한 달여 만에, 우즈베키스탄(이하 우즈베크)을 다녀왔다. 6월 20일부터 7박 8일간의 여정이었다. 이번 외유의 주목적은, 5월15일 출간된 ‘허선행의 한글 아리랑’(조철현 지음·라운더바우트)의 출판 기념회에서 특별 축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러나 명분에 불과했다. 30여년 ‘인생 절친’인 저자와는 몇 해 전부터 우즈베크와 관련된 다채로운 콘텐츠 기획 및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로 다짐해왔는바, "이제 때가 됐다" 싶어, 전격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좀처럼 내세우는 법이 없는 조철현은 사실상 출판계와 영상계의 베테랑이다. 1994년 일찍이 ‘여산통신’이란 회사를 차려 책 배달을 개척했다. 2003년부터는 인터넷방송 ‘온북TV’ 대표 PD였다. 2013년부터 몇 년간은 도서 소개 전문 케이블 방송 ‘BOOK-TV’를 경영하기도 했다. ‘기록문학가’요 ‘다큐멘터리 PD’를 자처하는 그는 "2005년 평양 민족작가대회 기록 다큐를 만들었다. 이후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2006~2010), 국립국어원 시절의 세종학당 프로젝트(2007~2009) 등 모국어 공동체와 관련된 여러 취재를 했다. 2005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을 시작으로 2016년까지 세계 주요 국제도서전에서 우리나라를 주빈국으로 초대했던 행사의 영상기록팀으로 활동했다." 그런 그가 2017년부터는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에 대한 크고 깊은 관심을 갖고 그 지역의 집중 취재에 뛰어들었다.
‘허선행의 한글 아리랑’은 그가 3년에 걸쳐 흘린 ‘피 땀 눈물’의 산물이다. 부제 ‘타슈켄트1 세종학당장의 우즈베키스탄 한국어교육 30년 기록 : 1992~2022’가 책의 성격을 적절히 제시한다. 허선행은 일행과 더불어 한·우즈베크 수교(1992년 1월29일) 40일도 채 되지 않은 3월8일 새벽, 우즈베크 수도 타슈켄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전남대 사범대 졸업 직후 은사의 권유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이 책은 그 인물의 30년 개인사를 통해 "‘한글 세계화’의 과정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직조"해냈다.
"(허선행은) 이제 57세의 중년이 됐다. 그 과정에서 지구촌 변방의 언어였던 한국어는 세계 중심의 언어로 바짝 다가서며 ‘꿈(Korean dream)의 언어’로 확장됐다. … 30년 동안 그가 가르친 8000명가량의 제자들 중 상당수가 한국어 교사가 돼 ‘한글 세계화’의 토대를 만들었다."
과장이 아니다. "(이 책은) ‘허 선생’이란 인물을 중심으로, 고려인의 디아스포라 역사와 한·우즈베크 수교 30년 발전사, 현지 한인사회 형성사 등을 밀도 있게 다루면서 중앙아시아 한류 열풍과 현지 청년들의 한국어 학습 열기 등도 자세히 담아냄으로써 ‘제2의 허선행’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깊은 감동을 전한다."
6월21일 오후 타슈켄트 한국문화예술의집에서 열린 출판 기념회가 선사한 잊을 수 없을 감동에 관해서는, 지면 관계상 상술하진 않으련다. 제2의 도시로 과거 실크로드의 주요 교착지였으며 우즈베크의 수도였던 사마르칸트와 명산 침간산이 안겨준 감흥도 넘어가련다. 하지만 내 61년여 인생에서 가장 보람찬 하루로 기록될 23일 그날의 일정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날 점심 무렵 나는 조철현과 함께 ‘아리랑요양원’을 방문해 김나영 원장 등 관계자와 30명이 채 안 되는 고려인 1세대 어른들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친구가 비매품으로 2020년 3월 세상에 내놓은 ‘고려인 디아스포라, 우즈베키스탄 아리랑요양원 10년의 기록’의 그 요양원이었다. 이후 세종학당으로 향했다.
학당 학생들 포함, 30여명을 대상으로 "왜 세계는 K-콘텐츠에 홀렸을까-‘오징어게임’과 ‘기생충’, BTS를 중심으로"란 주제로 특강을 했다. 지금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과자 쪼가리 등 소박하기 짝이 없는 선물을 들고 요양원을 찾은 우리 둘에게 무척이나 고마워하던 어르신들의 해맑은 얼굴과 몸짓, 그리고 말들을. 뭐 대단한 강의라고 1시간 반의 짧지 않은 시간을 호기심 짙은 태도로 경청하던 어린 청(소)년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세 번째 일정 또한 남달랐다. 7세 때인가 발발한 일명 루게릭병(근위축성측색경화증)과 더불어 이십수 년을 살아온 30대 초의 여 작가 지망생 포함 가족과의 저녁 자리였다. 그 미래의 작가에 대해서는 친구에게 일찌감치 들어왔던 터라, 그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첫 번째 선생에 이어 두 번째 선생이 생겼다며 기뻐했다. 그 만남 이후 그녀가 보내준 일련의 글들은, 작가로서의 가능성·재능을 증거하기에 모자람 없었다. 그때 난 결심했다. 그녀가 ‘좋은 작가’가 되는 데 힘닿는 데까지 힘을 싣기로 말이다. 단 장애라는 조건을 전제하지 않고, 절대적 기준으로.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를 경유해 타슈켄트에서 귀국한 지 2주가 지났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우즈베크, 아니 ‘중앙아시아 모드’ 안에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생각이나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을 곁들여서다. 이 일 저 일로 분주한 와중에도, 우즈베크 태생의 고려인 4세 한국 감독 박 루슬란의 범죄 드라마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2020)를 다운받아 관람하고, 2년 5개월째 고정 출연 중인 팟캐스트 프로그램 매불쇼 ‘씨네마지옥’ 코너에서 ‘강추’한 것도, 그런 맥락(Context)에서였다.
영화는 1979년 소비에트연방 시절의 카자흐스탄에서 벌어졌던 연쇄살인 실화를 수준급 솜씨로 극화한 카자흐-한국-우즈베크 합작물이자 ‘살인의 추억’의 박루슬란 버전이다. 2020년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을 공동으로 거머쥐었고, 올 4월에 일반 개봉됐다.
나는 이틀 후, 다른 일행들과 같이 박 감독을 만난다. 매불쇼에서 10년 이내에 그가 세계적 감독이 될 것이라고 큰소리쳤는바, 그 장담을 조금이라도 빨리 현실화시키기 위한 첫걸음을 실천적으로 내딛는 것이다. 자칭 ‘글로컬컬처플래너&커넥터’로서 단언컨대, 앞으로의 내 남은 삶은 허선행의 향후 비전을 포함해 ‘우즈베크 프로젝트’와 함께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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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찬일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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