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다 본인을 미워하지 않아요"… 판사 설득에 말문 연 '살인미수' 피고인
서울중앙지법 유영근 부장판사
'살인미수' 혐의 노숙자 입 열어
[아시아경제 김대현 기자] "이진호(가명)씨. 세상이 본인을 다 미워하고 그런 게 아닙니다.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사람도 많으니까, 무엇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될지 더 생각해보세요."(판사)
지난 2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서관 4층의 한 법정. 형사합의23부 유영근 부장판사가 살인미수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된 39세의 이씨에게 거듭 질문을 던졌다.
서울 시청역에서 노숙하던 이씨는 지난 5월14일 낮 말싸움이 붙은 피해자를 흉기로 10여 차례 찔러 살해하려다 옆을 지나던 시민들이 몰려들어 미수에 그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날은 첫 공판기일. 돌발상황에 대비해 교도관 3명이 피고인석 주변을 둘러싸 앉았고, 법원 경위 3명도 재판을 함께 지켜봤다.
이씨는 생년월일과 주소, 혐의 인정 여부 등을 묻자 무덤덤한 표정으로 "기억나지 않는다", "모른다"고만 답했다. 의자를 돌리며 상체를 흔들던 그는 반복되는 질문이 싫증난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유 부장판사는 멈추지 않았다. "피고인, 본인 행위에 대해 기억 안나요?" "(CCTV 영상을 보며) 저렇게 흉기 휘두른 거 본인 맞아요?" "잘못을 인정한다는 취지입니까 모르겠다는 겁니까 하지 않았다는 겁니까?…." 또 "특별히 전과가 많지도 않네요. 저는 이진호씨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 않아요. 그런데 위험하긴 하잖아요"라며 대답을 유도했다.
그러자 이씨의 말문이 열렸다. 문답을 종합해 보면 그는 3살 때부터 고아원에서 자랐다.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지방을 돌며 배달일을 했지만, 월급을 전혀 받지 못했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리고 노숙을 하게 됐다. 국선변호인에게도 말하지 않은 내용이였다.
이에 유 부장판사는 "혹시 정신감정을 받아보지 않겠느냐"며 "양형조사를 해볼 테니 조사관한테 본인에게 유리한 이야기를 해보라"고 이씨를 설득했다. 변호인보다 앞서 양형조사를 제안한 것이다. 양형조사란 피고인의 가정환경과 전과, 범행 경위, 합의 여부 등 형량을 따질 때 고려해야 할 사항들을 조사하는 절차를 말한다. 검사도 긍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이씨는 고개 저으며 거부했다. 누가 말을 거는 것도 재판이 길어지는 것도 싫다고 했다. 빨리 교도소에 가는 게 낫겠다고 했다. 변호인은 "피고인이 명시적으로 반대의사를 표시하지만 (정신감정을) 받아보는 게 좋을 거 같다"고 말했다.
유 부장판사는 "본인을 위해 국가에서 돈도 들이고 변호인도 붙이고 다 해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굉장히 위험한 행위를 저지른 것임에도 법적인 절차대로 하려는 것"이라며 "잘 생각해보고 본인이 잘못한 것을 말하면 어떨까 싶다. 이진호씨 귀에 들어올지는 모르겠지만…"이라며 이날 재판을 마쳤다.
재판부는 이씨의 정신감정 등을 위해 3개월가량 시간을 갖고 오는 10월15일 다시 재판을 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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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부장판사(51·사법연수원 27기)는 2016년 사회학적 상상력과 법적 균형 감각으로 한국인의 억울함에 대해 분석한 '우리는 왜 억울한가'를 출간해 화제를 모았다. 서울지방변호사회가 실시한 2020년 법관평가에선 22명의 우수법관 중 한명으로 선정됐고, 김소망 수원지법 안산지원 판사와 함께 평균 100점 만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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