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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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봄에 책의 부가기호를 조사한 적이 있다. 시집을 번역했는데 학교에서 연구 업적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책 유통에 필요한 도서번호(ISBN)의 부가기호에 의거해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도서는 연구의 전문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일부의 주장 때문이었다. 번역하는 분들이 문제를 제기해 규정을 바꾸기로 일단락됐지만, 작은 소동을 치르며 참 많은 생각을 했다.


한 사람의 연구 업적은 어떻게 판단되는가. 논문과 저서의 가치는 어떻게 다른가. 문학은 무엇인가. 필자는 시를 전공하면서 한영·영한 번역을 하고 있는데, 그간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 중요하기에 한국시 영역 작업을 꾸준히 했다. 그러다 지난해 미국 시인의 시집 ‘밤엔 더 용감하지’를 출간하면서 우리 독자들이 외국시를 읽고픈 열망이 크다는 것과 번역의 사회적 책무를 더 크게 실감했다.

노벨 문학상 계절이 다가오면 누가 상을 탔는지 신문에 도배되지만 막상 작가를 미리 소개하는 통로는 많지 않다. 지금 필자는 지난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루이즈 글릭의 시를 번역하고 있는데 당시 너무 낯선 이름이라 시인을 알고자 하는 전화가 빗발쳤던 기억이 난다.


시인이 위대한 것은 상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경험·언어와 대면한 오랜 고투의 시간이 노벨상이라는 결실로 맺어지는 것이다. 한 사회의 문화적 역량을 가늠하는 문학은 활발한 번역을 통해 평소에 교류의 물꼬를 꾸준히 트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작가는 늘 있다. 이를 다른 문화권에 알리려면 좋은 번역가가 필요하다. 그런데 번역가는 혼자 크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길러야 한다. 그러니 당부한다. 번역가는 번역하인이 아니다. 번역의 전문성을 인정하자.


한국연구재단 등 연구 성과를 발굴하고 독려할 책임이 있는 기관과 대학에서 이공계의 잣대로 연구를 평가하면 인문학 연구자들의 번역 기피현상은 더 심화할 것이다. 번역 없이는 문화 간 소통이 불가능하며 학문의 가치를 대중과 공유할 수 없다.


기계번역의 시대에 번역가가 필요하냐고 묻는 이도 있다. 기계번역이 가능한 분야가 있고 불가능한 분야가 있다. 시 번역을 할 때 필자는 시 한 줄을 두고 며칠 동안 고민하기도 한다. 그 한 줄이 내 지난한 공부 길의 실험이고 열매다. 수치적 통계로 도출되는 것만이 연구가 아니다. 문학 번역은 언어와 문화, 역사, 철학적 지식, 마음의 눈이 총동원되는 과정이다. 이 사회가 번역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할 때 우리 문화도 세계 안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대학이나 국가 기관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이들이 학문의 가치를 편견 없이 이해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부가기호를 조사하던 봄날에 생각했다. 우리 대학도 번역상을 제정하는 등 일련의 변화를 꾀하고 있긴 하다. 오늘도 책상에 앉아 시를 번역하며 생각한다. 문학은 세계라는 배를 지탱하는 평형수다. 번역은 그 평형수를 가늠하며 고달프게 노를 젓는 일, 기꺼이 몸을 낮춰 다리가 되는 일. 다리 없이 다른 두 세계가 만난 적이 어디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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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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