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와 싸우는 그들]눈길 위 라이더들 인삿말 “살아서 만나자”
체감온도 영하 20도…“빙판길 안 녹아 교통·낙상사고 속출”
생계 위해 배달 나서...주문 비례해 이륜차 사고도↑
전문가 “폭설 앞두고 사전 제설 조치 안 해” 지적도
[아시아경제 송승섭 기자, 이준형 기자, 김대현 기자] “폭설 이후가 더 위험해요. 특히 내리막길을 만나면 아찔하죠.”
9일 서울 강동구에서 만난 배달 라이더 유세현(50·가명)씨는 “아침에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에 나서다 넘어져 목과 어깨를 다쳤다”고 말했다. 유씨는 “며칠 전 쏟아진 눈이 아직 도로에 얼어붙어 오토바이가 미끄러진 것”이라며 “파스를 붙였지만 부상이 크다. 오늘 배달은 쉬려고 한다”고 한숨을 쉬었다.
9일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서 만난 라이더 유세현(50·가명)씨가 얼어붙은 골목길을 가리키고 있다. 유씨는 "오전에 배달에 나섰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넘어져 목과 어깨를 다쳤다"며 "고통이 심해 오늘은 배달을 쉬려고 한다"고 털어놨다. [사진 = 김대현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지난 6일 밤부터 시작된 폭설의 후폭풍이 라이더들을 위협하고 있다. 눈은 그쳤지만, 여전히 제설작업이 이뤄지지 않은 골목이 많기 때문이다. ‘도로 위 암살자’라 불리는 블랙아이스로 인한 사고 위험성도 크다.
직접 배달 해보니…빙판길에 휘청, 결국 엉덩방아
9일 서울 중구 충무로에서 본지 송승섭 기자가 한파로 얼어붙은 도보를 오르며 음식 배달을 하고 있다. 이날 관악구로 이동해 한시간 동안 배달을 진행하는 도중 빙판길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등 위험한 상황이 잇따랐다. [사진 = 김대현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이날 저녁 6시 기자는 직접 서울 관악구 일대에서 한시간 가량 도보 배달했다. 유동인구가 많은 대로변과 달리 햇빛이 닿지 않는 골목은 흡사 아이스링크장을 방불케 했다. 경사가 급한 내리막길에서는 얼어붙은 바닥에 몸을 휘청거리다 결국 엉덩방아를 찧었다. 해가 지자 눈은 흙과 뒤엉켜 아스팔트와 구분하기 더 어려워졌다. 영하 20도까지 떨어진 체감온도에 머리와 눈썹엔 고드름이 맺혔다.
문제는 안전을 신경쓰면 배달 일정이 밀린다는 것이었다. 빙판길을 걷는 순간에도 배달 앱에서 ‘음식이 모두 조리됐다’는 알람이 끊임없이 울렸다. 음식이 식으면 배달기사와 식당 평점이 깎일 수 있다는 걱정에 미끄러지듯 잰걸음을 걷는 수밖에 없었다. 폭설 후 배달은 사고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제시간에 도착하는 게 불가능했다.
라이더 “눈 내린 다음 빙판길이 더 위험”…사고 제보 잇달아
실제 배달 종사자들은 “눈이 그친 후가 오히려 사고 위험이 높다”라고 입을 모았다. 강남·서초에서 라이더로 일하는 박경석(49·가명)씨는 “폭설에는 모든 라이더가 운전에 주의를 기울이지만, 눈이 그치면 긴장이 풀려 사고가 나기 쉽다”면서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를 잘못 밟으면 바로 넘어지고 크게 다친다”고 설명했다. 안산에서 배달 일을 하는 남궁진성(44)씨도 “눈이 오고 한파가 지속되면 밤에는 모든 골목이 빙판길”이라며 “엊그제 해가 떠 있을 때는 배달을 하다 오후 5시부터 길이 미끄러워져 일을 중단했다”고 털어놨다.
배달종사자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티에서도 관련 제보가 잇따랐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엔 주말 빙판길에 ‘깔았다(사고를 당했다는 업계 은어)’는 제보와 함께 가급적 일을 나가지 말라는 메시지가 쏟아졌다. 전북에서 일하는 한 라이더는 “빙판길에 깔아서 팔꿈지와 허벅지, 골반을 다쳤다. 지금 운행은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고 경고했고, 이에 “살아서 만나자” “안전운전 하시라”는 격려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일부 라이더는 생계유지를 위해 배달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배달 수요가 높아, ‘지금 나가야 한 푼이라도 더 번다’는 생각에서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온라인 음식서비스 거래액은 1조6393억원으로, 전년 동월 대비 60.6%(6188억원) 급증했다. 이 같은 배달 수요에 비례해 라이더 사망 사고도 함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1~6월 이륜차 사고 사망자는 전년 동기 대비 13.7% 올랐다.
열악한 근무환경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11일 일부 지역서 눈이 내릴 예정인데다 이번 주 초까지 북극 한파가 한반도에 머무를 것으로 관측되면서다. 눈송이가 날릴 때만이 아니라 블랙아이스 등 위험 요소가 남아있을 때도 라이더의 처우와 안전이 개선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배달업체 위험수당 아쉬워” “정부, 예보에도 사전제설 미흡” 목소리
라이더들은 “배달 플랫폼 인공지능(AI)이 날씨보다는 주문량과 기사 수요를 고려해 배달 단가를 결정하는 측면이 강하다”면서 “도로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수수료가 오르긴 하지만 라이더가 감수하는 위험에 비하면 부족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구교현 라이더유니온 기획팀장은 “업체마다 배달 할증을 붙이는 기준이 제각각이라 라이더는 추가 배달료가 왜 붙는 건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며 “악천후 등과 관련된 합당한 보상 체계도 필요하지만 정부에서 표준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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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제설 조치가 미흡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라이더 김자형(32·가명)씨는 “코로나19가 발생하고 음식 배달 수요가 확실히 늘었다”며 “그만큼 정부가 배달 안전과 직결되는 골목길 제설에 더욱 신경써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강병화 한국시설물안전진단협회 명예회장은 “지난 폭설 당시 기상청이 기상예보를 했지만, 서울시의 선제적 대응이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본래 시군구 상황 관리반부터 비상 근무 체제로 돌입하고, 급경사지·고가도로 등 취약 지역을 위주로 사전 제설 작업이 이뤄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준형 기자 gilson@asiae.co.kr
김대현 기자 kd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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