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대변혁] 효율성보다 안정성 'GVC 새판 짜기'
포스트 코로나, 대변혁의 시대 …⑥기로에 선 글로벌 공급망
첨단기술·핵심소재 등 리쇼어링 유도…수요 많은 업종 해외 생산 비중 확대 '투트랙'
[아시아경제 김혜원 기자] 국내 굴지의 대기업 총수는 지난해 일본의 수출 규제 이슈가 불거지자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를 모은 경영 회의에서 글로벌 공급 체계를 원점에서 재검토할 것을 강하게 지시했다. 당시에는 이미 경쟁사 대비 대응이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맞고 보니 오히려 빠른 대처였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과 몇 달 새 이 기업은 중국과 일본 소싱 편중을 완화하는 작업을 진행했고 동남아시아에서 판로를 확보했다.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아 극심한 경영난을 겪는 대한민국 재계가 '글로벌밸류체인(GVC) 새판 짜기'라는 난제의 중심에 섰다. 코로나19 발병에 따른 전 세계 공장 연쇄 셧다운(shut down·일시적 업무정지)으로 사상 초유의 제조업 마비 현상을 경험하면서 그동안 물밑에 있던 GVC 체계의 구조적 한계가 수면 위로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 간 무역 분쟁에 이어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 규제로 공급망 붕괴의 1차 타격을 입은 국내 기업들은 코로나19 돌발 변수까지 겹치면서 일제히 GVC 전략 재수립에 나섰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지난 2월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안정적인 부품 조달 공급망 구축을 위해 생산 전략을 재점검하는 중"이라면서 "핵심 소재·부품의 특정 국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국산화, 다변화가 필요하다"고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무역협회 통상지원센터는 14일 발간한 보고서 '포스트 코로나19 시대 통상 환경의 변화'를 통해 코로나19의 발발로 세계화의 취약성이 드러나고 탈세계화가 화두로 떠올랐다면서 효율성이 아닌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비한 핵심 물자의 재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필요시 수출입선을 전환할 수 있는 다변화 태세를 구축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세계 경제 호황기에 발생한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와는 달리 이번 코로나19 사태에는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미·중 통상 분쟁 심화, 세계무역기구(WTO) 기능 약화 등 보호무역주의 확산과 겹치면서 국제 공조가 어려운 환경적 요인이 작용한다는 분석에서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연합(EU)은 물론 일본은 정치·경제학적 근거를 들어 코로나19를 계기로 중국 등 특정 국가 의존도가 높은 핵심 산업과 기업을 본국으로 불러들이는 리쇼어링 정책을 속속 내놓고 있다. 일례로 일본 내각부는 '서플라이 체인 개혁'이라는 명목 아래 부품ㆍ소재 생산기업 복귀 비용의 2분의 1(대기업) 또는 3분의 2(중소기업)를 정부가 보조하는 파격적인 인센티브 방안을 내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반도체 자급자족 카드를 꺼내 들어 전후방 생태계 교란을 예고한 상태다.
우리 기업 중에서는 코로나19 영향권에 가장 먼저 들어 공급망 리스크를 절감한 자동차산업계가 GVC 재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 글로벌경영연구소는 최근 '포스트 코로나19 시대 트렌드 변화'라는 내부용 보고서를 통해 중국 중심의 공급망을 베트남, 캄보디아 등으로 다변화할 것을 주문했다. 실제 국내 완성차 제조사는 코로나19 초기 '와이어링 하니스'라는 100만원도 채 안 되는 노동 집약형 부품의 수급 차질로 공장 문을 모두 닫고 중국 외 다른 지역에서 비싼 가격에 재고를 확보하는 다소 황당한 일을 겪어야만 했다. 전염병이 새로운 위협 요인으로 부상하고 국가 간 장벽이 높아지면서 현대기아차를 비롯해 국내 완성차업체들이 효율성 위주의 전략에서 조달처 다변화 등 공급망 안정성 확보로 전략 방향을 수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전문가들은 중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신흥국 중에서 대체 생산 기지와 소비시장을 찾는 게 시급하다는 조언을 내놓는다. 삼성·LG그룹이 스마트폰과 디스플레이 제조 거점을 중국에서 베트남, 인도 등 신흥국으로 점차 옮겨가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차세대 첨단 기술과 핵심 부품·소재산업은 리쇼어링을 유도해 미래 경쟁력을 선제적으로 확보하는 한편 대량 생산 수요가 많은 업종은 과감하게 해외 소비 거점에서 생산 비중을 확대하는 투트랙 공급망 다변화로 리스크 헤지를 세분화해야 한다는 진단이다. SK이노베이션과 LG화학 등 2차전지(배터리) 제조사가 북미와 유럽 등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 공장을 짓고 현지 생산과 판매 비중을 늘리는 전략을 택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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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목 이화여대 교수는 이를 해외에서 생산해 현지에서 수요를 충당하는 '디소싱' '디쇼어링'의 개념으로 신규 정의하면서 "첨단 기술과 핵심 산업 부문은 리쇼어링을 통해 국내에서 안정적 기반을 토대로 혁신을 지속적으로 이뤄나가도록 하고, 이러한 혁신의 결과물을 대량 생산하거나 판매하는 시설 및 인력은 해외에 거점을 설립하고 현지에서 생산해 현지에 판매하는 산업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산업 분야에서 두뇌 부문은 국내에 두고 팔다리에 해당하는 나머지 부문은 과감하게 해외 현지에 두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코로나19가 미·중 무역 분쟁과 일본의 수출 규제 여파로 가치사슬 전략을 고민하던 기업들에 GVC 재편을 촉진하는 중요한 모멘텀이 된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이윤 추구를 최우선으로 하는 기업 경영 관점에서 GVC 재편의 당위성에는 공감하나 구체적 실행이 얼마나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론도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100이 GVC 체제라면 5 정도 변형이 있을 것으로 본다"면서 "코스트(비용)가 곧 제품의 경쟁력인 치열한 시대에 하루아침에 효율보다 안정을 내세우긴 어렵다"고 했다. 허정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삼성이나 현대차도 마찬가지인데 앞으로는 인건비나 가격 등 제조 비용보다는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와 브랜드 파워 등 서비스를 활용한 혁신으로 가야 GVC 변화에 적응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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