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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인생을 나누는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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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저녁. 서울 마포구 합정동 깊숙이 자리 잡은 작은 식당에 7명의 여성이 모였다. 한 명은 주인, 여섯 명은 손님. 식사는 다 같이 준비했는데 이 식당 콘셉트가 직접 만들어 함께 나눠 먹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난도가 높은 면 삶기와 고기 익히기는 주인인 A가 전담했다. 그래도 난생처음 스파게티 면을 뽑는다든가, 완자를 빚고 샐러드를 버무리는 과정이 즐겁고 새로웠다.


요리가 끝난 뒤 일곱 명 모두 식탁에 둘러앉았다. 음식을 나누며 비로소 통성명을 했다. 몇은 전 직장 동료, 몇은 친구의 친구…. 공통점은 40대 중ㆍ후반의 일하는 여성이라는 것, 또 왜 살고 왜 일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꽤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왔다는 것이었다.

테크기업 리더인 B는 요즘 '이 일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할까'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고 했다. 한 달 중 2주 이상을 출장지와 비행기 안에서 보내는 고된 일상, 폭주하는 업무와 갈수록 커지는 책임감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밸런스를 잡고 있는 까닭이다.


대기업 임원인 C 또한 '지금쯤 잠시 멈춰야 하나'라는 고민을 종종 한다고 털어놨다.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 갈수록 커져서다. C는 "어느 날 장기 출장에서 돌아와 보니 분명 기어 다니던 아이가 거실 저기서부터 막 뛰어오더라. 아기 봐주시던 이모님께 얘가 언제부터 걸었냐고 여쭤보니 '며칠 됐다'고 하셨다. 그때 일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은 모두에게 익숙한 테마였다. 글로벌 컨설팅 펌에서 주목받던 D는 몇 년 전, 무 자르듯 사표를 내고 지방으로 내려갔다. 주변 이들에겐 분명 놀랄 만한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D는 이미 꽤 많은 '준비'를 한 터였다. 회사 밖 모임에서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만나, 오랜 취미를 직업으로 삼을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실제로 몇 년을 그렇게 느슨하게 보내다, 꼭 하고픈 일을 만나 자연스럽게 서울로 돌아왔다.


E 또한 몸담던 회사에서 한두 손가락에 꼽힌 여성 리더였다. 어떤 계기로 '아이가 더 크기 전 온전히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겠다'라는 결심을 하고 1년여의 휴식기 동안 일에 대한 생각 또한 깊이 다듬었다. 새로 자리 잡은 곳은 이전 직장보다 덜 화려하다. 그러나 E가 원하던 젊은 기운, 새로운 도전, 성과에 대한 더 명확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


기업 경영진이던 F는 사회생활 20년을 채운 뒤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이후 2년, 아이들과 부대끼며 향후 20년 커리어를 숙고했다. 새로 시작한 사업은 이전 경험이 유용하지만 장르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그럼에도 빠르게 자리 잡아 업계 중심으로 치고 들어가고 있다. 자잘한 스킬이 아닌 본원적 역량이 튼튼한 덕분이다. A 또한 뉴욕 월가의 유능한 금융인에서 요리사라는 뜻밖의 영역으로 삶의 지평을 넓힌 케이스다.


그러고 보면 A와 D, E, F의 경험은 요즘 한창 고민 중인 B와 C에게 참으로 긴요한 팁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커리어의 휴지기와 전환을 경험한 이들에게도 서로의 이야기는 소중하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하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무엇보다 이런 속 깊은 이야기를 주저 없이 털어놓고, 건설적 조언과 격려를 받을 수 있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모두 다음 날 일정이 빡빡했음에도 밤 12시가 넘도록 대화를 이어간 연유였다.


알고 보면 일하는 모든 여성에게는 이런 지지와 도움이 필요하다. 엄마로서의 나, 아내로서의 나 뿐만이 아닌 경제적 주체이자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 자신에 대해 인정받고 존중받는 기회. 모험적이고 비관습적인 도전에도 기꺼이 박수를 보내주는 선의의 공동체. 무엇보다 그런 사회적 친구를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과 여유.


더 많은 여성이 그 같은 커뮤니티에 속할 수 있을 때, 우리 사회는 더 살 만한 곳이 되지 않을까.


이나리 헤이조이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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