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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봄날의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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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현정 기자] 봄이라는 단어가 주는 평화롭고 온화한 기운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유명 작가 답게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곰 한 마리를 끌어다가 봄에 대해 찰떡같은 표현을 쓰기도 했다. 클로버가 핀 언덕에서 함께 뒹굴기 놀이를 하자고 청하는, 벨벳처럼 털이 부드러운 아기곰 이라니.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봄의 분위기는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러나 특정 계절이라고 해서 모두가 부둥켜안고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봄이고 겨울이고 간에 먹고 사는 문제나 자기 세상의 정의, 행복한 삶을 위한 투쟁은 멈추지 않는다. 날씨도 따뜻하고 미세먼지 걱정도 덜한 요즘, 광화문을 오가며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2019년 5월 현재 이 곳은 목소리의 집합소다. 문재인 정부, 박원순 서울시장, 자유한국당, 동성애, 신을 믿지 않는 것에 격노한 사람들이 상주한다. 합법적으로 집회와 시위를 할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모든 외침은 보장돼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각자의 입장이라는 게 있고 또 길을 막거나 크게 소리치지 않으면 잘 들어주지 않는 세상이니까.


그러나 지난 1일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통제 상태인 도로를 감안해 어떤 방식으로 퇴근 할까 고민하며 길 위를 서성이던 와중 결국 이 집회의 자유를 부정하고 말았다. 특정 정치 진영을 혐오하는 단체가 광화문 사거리 천막에서 스피커를 통해 내뱉는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나. 자기 주장을 하다가 흥분해 튀어나온 실언이 아니라 작정하고 녹음해 틀어주는 외침을 듣다가였다. 이들은 지치지 않고 어린 동물과 숫자를 찾아댔다. "야 이 (순화하자면) 갓 태어난 강아지들아"라고 누가 선창하면 같은 말을 떼로 복창하는 구성이다. 왜 그런지에 대한 설명이나 설득은 없다. 그냥 주구장창 동물, 숫자, 동물, 숫자….


그날 따라 어린이와 청소년이 많았던 광화문 광장에서, 영문도 모른 채 쩌렁 쩌렁 울리는 찰진 욕설을 듣던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112에 신고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설명하며 '오늘 많이 바쁘실 것은 알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니 경찰관은 현장을 살피겠노라고 말했다. 시인 박준은 '봄날은 사람의 눈빛이 제철'이라고 했다. 가끔은 이 곳에서 제철을 맞아 빛나는 눈빛도 보고 싶다.



김현정 기자 alpha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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