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100명이 넘는 '어린왕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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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한 번씩 들춰보게 되는 '인생책'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처음 그 책을 펼쳤을 때 느꼈던 감동과 여운을 다시 기억해내고 가슴이 설렐 수 있다면 팍팍한 일상에서 단순한 추억을 넘어 큰 위로가 되곤 하기 때문이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는 많은 사람이 어린 시절 한 번쯤 읽어본 책이지만, 어린왕자와 여우, 장미꽃 그리고 다른 등장인물 간의 대화에 담긴 숨은 뜻과 은유적 표현을 모두,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꽤나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영어 공부를 핑계로 큰맘 먹고 영문판을 집어 든 적도 있지만, 이미 한글판 번역에 익숙해진 터라 혼자서 행간의 미묘한 차이까지 짚어내며 읽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정서씨가 쓴 'Le Petit Prince-<어린왕자>로 본 번역의 세계'는 원작인 불어판과 한글 번역을 한 페이지씩 배치해 비교하며 읽을 수 있게끔 구성했다. 원문에 충실한 직역을 통해 기존의 수많은 '어린왕자' 책에서 놓치고 있던 부분까지 그려내고자 쉼표나 접속사 하나도 빼지 않고, 어떤 수식어도 임의로 빼거나 더하지 않았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물론 불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중간중간 주요 구절에 대한 해설을 달고, 영어 번역과 비교하고, 서로 다른 한글 번역까지 나열해 차이를 보여준다. 국내에서는 1960년 안응렬 교수가 처음 '어린왕자'를 번역한 이후 100종 이상의 번역본이 출간됐다고 하니 어쩌면 우리에겐 100가지가 넘는 '어린왕자' 책이 있는 셈이다.

앞서 번역계에 큰 논란을 가져왔던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번역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한결같다. 작가가 쓴 그대로의 서술 구조를 지켜줘야 하며, 역자가 임의로 작가의 문장을 해체하는 번역은 '의역'이 아니라 '오역'이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또 우리의 번역이 의역의 범위를 확대해서 이상할 정도로 '해석'에 집착한다고 지적한다. 번역이란 게 원래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바꾸는 것이기에 기본적으로는 의역이 맞지만, 있는 그대로 옮기면 단정하고 의미 깊은 문장을 역자가 임의로 해석해 어설픈 문장으로 만드는 데 익숙해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내 비밀은 말이야. 그건 매우 단순한 거야. 우리는 단지 마음으로만 볼 수 있는 거야. 절대로 필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이정서 역)


"그럼 비밀을 가르쳐줄게. 아주 간단한 거야. 오직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김** 역)


물론 번역의 세계에 깊이 닿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작은 차이가, 이제와 소설의 감동을 흐트러뜨리거나 반감시키진 않는다고 본다. 다만 내가 읽었던 '어린왕자'가 꼭 한 가지는 아니라는, 살짝 다른 그 느낌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소설은 또 다른 감동과 울림을 준다.


나이가 들어 다시 읽는 소설에선 이전엔 무심코 넘겼던 부분에 눈이 번쩍 뜨이기도 한다. 사막에서 길을 잃은 어린왕자가 일주일에 한 알만 먹으면 더 이상 물을 마실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는 알약을 파는 상인과 나눈 대화가 그러했다.


"전문가들이 계산을 해봤거든. 일주일에 53분을 절약해주지."

"그러면 그 53분을 어디에 써?"

"원하는 걸 하는 거지…"

'나라면…' 하고 어린왕자는 생각했다. '만약 내게 53분이 주어지면, 나는 아주 천천히 샘을 향해 걸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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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지금 남는 시간이 있다면, 딱 한 구절만이라도 서로 다른 번역이 가져오는 차이를 직접 느껴보시라.


생텍쥐페리·이정서 지음/ 새움/ 1만4000원

생텍쥐페리·이정서 지음/ 새움/ 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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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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