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아주 오래된 책/김화순
빗소리를 적는 영국사 은행나무
빗방울 떨어질 때마다 글자 획이 늘어난다
누천년 동안 집필 중인 고서
사유의 무게로 어깨 내려앉았다
구름과 바람과 햇살이 무장무장 씌어진 책갈피
가을이 책장 넘기며 바랜 시간을 읽고 있다
햇살 아래 녹아내린 이카루스의 전언들
부은 발등 수북이 덮고 계절을 복기하고 있다
나무 그늘에 들어 내 그림자를 벗어 버리자
겹겹 주름진 불안이 서서히 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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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없이, 대책 없이, 여지없이 불려 나오는
나,
를 읽는다.
■사람들은 흔히 시를 두고 어렵다고들 말한다. 맞는 말이다. 어떤 시는 아무리 읽어 보아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시를 제대로 쓰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난해해서일 수도 있다. 그래서 좋은 시와 그렇지 못한 시가 있을 뿐 난해한 시를 두고 단지 어렵다는 이유로 나쁘다고 타박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라고 타이르기도 한다. 이도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어쩌면 단지 기호의 문제이겠는데, 나는 요령부득의 상태를 적은 시가 좋다. 도무지 어찌해 볼 도리도 없고 그저 속수무책인 순간 그래서 가차 없이 영락없이 발가벗겨진 자기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순간을 적은 시 말이다. 시가 어려운 이유는 아니 실은 시의 안쪽을 감히 바라보기 두려운 까닭은 이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주 오래되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읽힌 적이 없는 책인 '나'를 적는 일이 시 아니겠는가.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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