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누군가의 역
 순진하게 내려와 앉으며 정차하고는
 지나간 이름들이 자라 나와 내리는
 모든 바닥들
 바닥에 시간이 뿌려 두고 간 낱알들이 살이 올라
 바람 부는 쪽으로 아무렇게나 서걱거려도 좋은 시간
 바닥에 앉아야 기다림이 익지
 아무 곳이고 역이 되지
 나지막이 다들 내려주고 남는 바닥이야
 잠드는 역을 떠나는 막차들은 불을 끄고 천천히 떠나가고

[오후 한 詩]밤은 누군가의 역/김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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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남은 바닥은
 흐릿하게
 순진한 깊이
 마감이 임박한 오늘에게
 시간만이 데려다줄 수 있는 안식을 주는 깊이
 아직 그날인 누군가
 그대 그대로 붙잡아도
 어둡기만 한 대답들이 충만해지는
 가만히 내려앉아 등 뒤가 되어 주는 누군가의 역
 등으로 다가가는 일이 밤이라니
 그대가 그대로 이날이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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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생각나는 이름들이 있다. 그 이름들을 따라가다 보면 웃을 때도 있고 민망할 때도 있고 서글플 때도 있다. 아무려나 괜찮다. 다 내가 지나온 길들이다. "바람 부는 쪽으로 아무렇게나 서걱거려도 좋은 시간"이다, 밤은. 그렇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서걱이다 "나지막이 다들 내려주고 남는 바닥", 그 길들 끝에 그 마지막에 어떤 이름 하나 있다. 이름이긴 한데 분명히 기억나지는 않는 이름, "가만히 내려앉아 등 뒤가 되어 주는" 이름 하나 말이다. 그렇게 "밤은 누군가의 역"이다. 그 역에서 오랫동안 기억나지 않는 당신 곁에 머물렀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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