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밑줄/노현수
언제 그어 놓았을까
문적해진
저 흐린 밑줄을
물큰한 말들이 만져지고
처음 본 얼굴들은 나를 아는 듯
기억을 읽는다
낮달이 흔적을 지운다
별은 보이지 않고
구름 한 줄 여릿하게 길을 긋는다
몸이 기억하는 병이 깊어
수묵이 이마를 짚는다
바람이 분다
꽃들이 흔들린다
내가 사라지고 네가 사라졌다
네가 사라지고 내가 멈추어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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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적한 시간을 기록하듯
또 누가 밑줄을 읽는다
■시를 읽는 여러 즐거움들 가운데 하나는 평소 자주 사용하지 않던 단어를 만나는 일이다. 이 시에 쓰인 '문적하다'가 그러한데, 이 단어는 순우리말로 그 뜻은 '무르고 연한 물건 따위가 조금만 건드려도 뚝 끊어지거나 잘라지다'이다. 낮엔 좀 덥긴 하지만 아침저녁으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다. 가을은 참 문적하지 않은가. 차라리 투명하다고 말해야 옳을 듯싶은 푸른 하늘도 문적하고, 그 하늘에 떠 있는 "구름 한 줄"도 "여릿하게" 문적하고, 잠자리도, 잠자리가 잠시 내려앉곤 하는 코스모스도 문적하고, 한여름 내내 쨍쨍하던 매미 울음소리도 이젠 문적하다. "내가 사라지고 네가 사라졌다" 그리고 "네가 사라지고 내가 멈추어 선" "문적한 시간", 가을은 문득 적막해지는 계절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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