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호의 라이브 리뷰] 베토벤 여정… 컴백
백건우가 무대에 등장하는 모습은 한결같다. 흰 터틀넥 스웨터에 턱시도를 받쳐 입은 그가 느리게 피아노에 다가오면서부터 음악은 시작된다. 큰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 뒤 허공을 응시할 때 슬쩍 엿보는 해탈의 모습은 성직자나 구도자의 자세에 준한다.
백건우가 2007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회를 마친 다음, 예술의전당에 모인 관객들이 일제히 기립해 주인공을 다시 무대로 불러냈다. 오랜 음악 인생 중에서도 특별했던 순간을 담은 사진을 백건우는 지금도 무척 아낀다. 감동의 여운이 오래가는 연주회가 백건우가 꿈꾸는 이상적인 공연이다. 이달 1일부터 8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백건우가 10년 만에 다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집을 살핀다(3일 2회 공연, 4일 휴식).
열정적인 연주보다 오랫동안 쌓아온 내공을 천천히 내보이는 무대를 좋아하는 백건우에게 '피아노의 신약 성서'로 불리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은 최적의 레퍼토리다. 전곡 연주회를 통해 '월광' '열정' '비창' 같은 유명 곡에 가려있던, 약간은 어렵지만 평소에 듣기 어려운 곡들을 관객이 체험하고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길 일흔 한 살의 거장은 희망한다.
백건우가 지켜온 일관된 자세에서 후대는 순수함을 유념해야 한다. 기교적으로 곤란한 부분을 잘 처리하느냐로 예술의 순도가 정해지지 않고, 한 눈 팔지 않고 음악에 침잠하는 정진이 음악인의 대기만성을 이루는 근원이다. 베토벤 전곡을 준비하는 과정이 백건우 정신의 요체다.
2005년부터 4년여의 녹음과 함께 베토벤의 역사를 더듬던 기간, 백건우는 자연을 통해 '악성'(樂聖)의 이해를 넓혔다. 그동안 유명하고 중요한 곡들을 연주할 때 마다 산을 넘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서로 다양한 모습을 가진 산이 모여서 거대한 산맥이 형성되고, 넓은 시야로 산맥을 조망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음을 고백했다. 젊은 날 유명해지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던 세월에도 "공부가 덜 됐다"며 섣부른 베토벤 연주를 피하던 백건우다.
젊은 시절, 수련을 더 한다고 음악회를 갖지 않으니 연주 수입이 일정하지 않았고,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도 그의 곁을 지킨 건 부인 윤정희다. 지금도 인터뷰나 연주회 모두 윤정희가 '미스터 백'의 곁을 지킨다. 백씨 부부가 기억하기 싫어하는, 1977년 유고 자그레브에서의 북한 공작원 납치기도 순간에도 그들은 함께 있었다.
단순히 건반주자 남편을 내조하는 게 아니라 동반자의 음악에 자신감을 북돋운 게 부인이었다. 2000년대 중반, 백건우 스스로 베토벤에 대해 "할 말을 해야겠다"고 판단했을 때 이를 격려한 게 그녀다. 어느 순간 연주 섭외가 뜸할 때면 "레퍼토리나 늘리지"라고 미소 짓던 남편의 베토벤이 윤정희는 사실 오래 전부터 자신 있었다. 세월을 들여 뜸을 들인 결과물은 사실상 부부 합심의 베토벤이다.
2010년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노장의 연주로 보는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오는 9월 통영을 방문하는 백건우와 동갑내기, 루돌프 부흐빈더(1946년생)가 음반에서 이룩한 베토벤 소나타집의 성과가 탁월하지만, 2000년대 초중반, 안네 욀란드(Anne Øland, 1949년생)와 안드라스 쉬프(1953년생)의 전집 녹음과 공연 이후 음악계를 뒤흔들 충격적인 시도는 뜸해졌다. 마우리치오 폴리니(1942년생)의 전곡 녹음도 1975년 단편적으로 시작되어 2014년에 완성될 만큼 베토벤 소나타 전집은 절대적인 시간과 가공할 체력을 요한다. 일주일 동안 베토벤의 역사를 개괄하는 백건우의 시도를 음악계가 에베레스트 등정에 비유하는 이유다.
그러나 백건우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곡 연주는 마라톤 같다는 입장이다. 뜀박질을 시작하면 쉼 없이 달리는 것이 맞지 중간에 휴식도 취하고 체력을 보충하는 식으로 완주하는 방식에선 진정성을 찾지 못한다. 10년 전처럼 이번에도 8회 공연 전부를 패키지로 구매하는 열성의 팬들이 백건우의 뜻을 먼저 헤아렸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집을 완성한 다음, 백건우는 연말까지 지방 곳곳을 다니며 베토벤 소나타를 마저 정리한다. 예정된 베토벤 연주 일정이 끝나면 재충전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보이며, 기획사는 한동안 국내 공개 연주회를 줄이는 방향으로 컨디션의 조절을 권고 중이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자신의 음악을 존중했던 지휘자 졸탄 코치슈, 이르지 벨로흘라베크의 부고를 연이어 접한 터라, 앞으로 새로운 지음(知音)을 시니어 지휘자 군에서 찾긴 어려워 보인다. 협주곡 대신 독주곡으로 활동 영역이 좁혀진다면 '피아노의 구약 성서',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1-2권에 대한 기대는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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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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