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식품 '노익장' 1세대들의 잇따른 퇴장…'지는 별' 명예로운 은퇴 준비
롯데 창업주 신격호, 70년만의 퇴진…日롯데홀딩스 이사 퇴임
식품업계 거목 별세…노익장 창업주들의 은퇴 준비 가속화
[아시아경제 이선애 기자] '맨손의 거인'으로 불리며 굴지의 롯데를 만든 1세대 창업주 신격호 총괄회장. 그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유통·식품업계 '장수' 창업주로 주목을 받았던 그는 야속한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신 총괄회장의 퇴장으로 유통·식품업계 세대교체 시계가 더욱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식품업계 산증인의 잇따른 별세 소식이 전해진 가운데 남은 이들도 승계작업을 마무리하고 명예로운 은퇴를 준비 중이다.
◆롯데신화 신격호의 쓸쓸한 퇴장= 26일 재계에 따르면 롯데홀딩스는 최근 도쿄 본사에서 열린 주주총회에서 이번에 임기가 만료된 신격호 총괄회장을 새 이사진에서 배제하기로 의결했다. 이에 신 총괄회장은 이번 롯데홀딩스 이사직 퇴임으로 70년만에 롯데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됐다. 이미 국내 주요 계열사 이사직에서 줄줄이 물러나면서 그의 퇴장은 예견된 일. '마지막 보루'였던 롯데홀딩스 이사직까지 배제되며 이른바 '신격호의 시대'의 종식도 공식화됐다.
일본 롯데홀딩스는 13개의 일본 롯데 계열사의 지주회사일 뿐 아니라 한국 롯데의 지주회사 격인 호텔롯데 지분 19%를 보유한 롯데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이다.
자수성가로 일본과 한국에서 '롯데 신화'를 일군 신 총괄회장은 95세(1922년생) 고령임에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기업 경영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줄곧 경영의지를 밝혀왔다. 그러나 가족 경영 분쟁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그의 말년을 초라하게 만들었고 그의 퇴장 역시 경영비리 혐의 재판으로 얼룩져 쓸쓸하기 그지 없는 상황이다.
◆별처럼 진 식품업계 산증인= 지난해 식품업계는 노익장을 과시하던 식품업계 창업주의 잇따른 별세 소식이 전해져 충격을 안겼다.
국내에 카레를 대중화한 일등 공신인 함태호 오뚜기 명예회장은 지난해 9월12일 향년 86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오뚜기를 창업한 이후 47년간 국내 식품산업의 발전을 위한 외길 인생을 걸어온 한국 식품산업의 산증인이다. 품질제일주의로 한 평생을 바친 그는 국내 식품산업의 제품 대중화를 이뤘다.
1969년 5월 오뚜기를 창립하고 첫 제품으로 '카레'를 출시하며 국내에 처음 대중화시켰다. 1971년 제대로 된 케첩을 처음 생산했고 이듬해에는 마요네즈를 국내 최초로 상품화했다.
1978년 국내 최초로 2단계 고산도 식초 발효공법에 의한 2배 식초, 3배 식초를 개발했다. 이후로도 샐러드드레싱, 식초, 순식물성 마아가린, 레토르트 제품 등 보다 앞선 제품을 소비자들에게 선보이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고인은 맛과 품질에 대해 소비자에게 철저히 책임을 지는 기업인이기도 했다. 매주 금요 시식에 직접 참여해 시식평가를 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등 맛과 품질에 대해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직접 챙겼다. 이러한 그의 집념과 철학이 국내 식품회사 중 가장 많은 1등 제품을 보유할 수 있는 이유다.
국내 조미료의 대명사가 된 미원을 만든 임대홍 대상그룹 창업주도 지난해 4월5일 96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일본에서 조미료의 성분인 글루타민산 제조 방법을 연구한 임 명예회장은 이듬해 부산으로 돌아와 동아화성공업을 세웠다. 여기서 국산 최초의 발효조미료를 만들었고 오늘날의 미원을 탄생시켰다.
당시 국내 소비자들의 밥상은 일본인이 개발한 조미료 '아지노모토'가 장악하고 있었다. 임 창업주가 미원을 선보이자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미원 열풍이 불었다. 어떤 음식이든지 미원만 넣으면 맛이 살아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제품은 날개 돋힌 듯이 팔려나갔다.
60년대 중반 임 창업주는 국내 최초로 발효법에 의한 글루타민산 생산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이후 20여 종의 아미노산과 핵산 등의 제조기술을 개발하는데 일조했다.
그는 삼성그룹의 이병철 창업주가 평생의 한을 갖게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조미료 시장에 진출할 당시 최고의 대표 브랜드인 '미원'을 꺾으려고 온갖 마케팅을 펼쳤으나 '미원'의 높은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는 말년에 자신의 의지대로 안된 것 중 하나가 '미원을 누르지 못한 것'이라고 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명예로운 은퇴 준비중인 1세대 창업주= 식품업계의 두 거목이 떠난 가운데 아직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장수하는 1세대 창업주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승계작업을 마무리하고 명예로운 은퇴를 준비 중이다.
식품업계 최고령 창업자는 1917년생 정재원(100) 정식품 명예회장이다. 국내 최초 두유 개발자인 정 명예회장은 2000년 현업에서 물러나 콩에 대한 최신 해외 연구 동향을 살피고, 후학양성에도 매진하고 있다. '인류 건강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고저'를 정식품의 창업이념으로 삼은 그는 2010년 2세인 정성수 회장에게 가업을 물려줬다.
농심의 세대교체도 이뤄지고 있다. 신춘호(87) 회장이 아직도 일주일에 2~3일 출근해 주요 신제품 개발과 마케팅 현안을 챙기고 있지만 경영은 장남 신동원 농심 부회장에게 맡긴 상태다. 신 부회장의 입지를 탄탄하게 하기 위한 지배구조 정리 움직임도 본격화됐다. 최근 신 회장의 장남과 차남이 농심홀딩스와 율촌화학 주식을 교환하며, 각자 경영하고 있는 회사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 원양어업의 개척자' 김재철(82) 동원그룹 회장은 일찌감치 장남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부회장에게 금융 사업을, 차남 김남정 동원엔터프라이즈 부회장에게 식품 사업을 맡겨 후계구도를 정리한 상태다.
업계 관계자는 "식품업계 1세대 창업주들이 떠난 자리에는 이미 2세들이 속속들이 들어 정면 경쟁을 펼치고 있다"며 "올해를 기점으로 세대교체가 가속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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