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철응 기자]1943년 봄,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잠수함들은 3주만에 100척이 넘는 적 선박을 침몰시켰다. 전체 전황을 연합군에 불리하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바다에서의 전세가 역전됐다. 격침되는 연합국 선박의 수는 급격히 줄어든 반면 독일 잠수함들은 침몰을 거듭했다.


영국 함대사령부가 독일 잠수함들의 이동과 공격 계획을 미리 알게 됐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은 것은 한 사람의 천재였다.

1939년 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은 곧바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그 다음날 27살 청년 앨런 튜링을 ‘정부암호학교’의 암호해독반 팀장으로 발탁했다. 그는 이미 두 해 전에 컴퓨터의 전신이라 할 ‘튜링기계’를 발명한 수학자였다.


세계에서 가장 정교하고 난해하다는 독일군의 암호 타자기 ‘에니그마’(그리스어로 수수께끼라는 뜻)가 튜링의 상대였다. 하루 안에 암호를 풀어야 소용이 있지만, 초창기 암호학교에서는 몇 달이 걸렸다.

튜링은 에니그마에서 사용되지 않는 철자들을 추려내 100만가지가 넘는 경우의수를 획기적으로 줄였다. 그리고 가장 많이 나오는 철자들을 모아 군대용어 중 자주 쓰이는 단어들과 비교했다. 독일군은 매일 오전 6시가 되면 그날의 날씨를 일선 부대에 타전했는데, 그것이 단초였다. 튜링은 암호화된 지시를 일기예보의 폭풍, 비, 파도 등 단어들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영국군은 암호를 해독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일부러 시간을 둬가면서 독일 잠수함들을 공격해야할 정도였다고 한다. 튜링은 전쟁 뿐 아니라 과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 컴퓨터의 시초를 만들었고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인공지능에 대한 개념도 그로부터 비롯됐다.


튜링이 바꿔놓은 토대 위에서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라는 또 다른 천재들이 다시금 한 차례씩 세상을 변화시켰다.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듯이, 역사는 도도한 물결이지만 결정적 변곡점에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결정적 인물, 사람이 있었다.


튜링이 전쟁과 컴퓨터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우장춘 박사는 6·25 전쟁 이후 한국의 배고픔을 덜어준 일등공신이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한 명의 인재가 만명을 먹여 살린다"고 했는데, 우 박사는 전국민을 실제로 먹여 살리는 업적을 세웠다.

우장춘 박사(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우장춘 박사(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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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좋고 병에 강하며 속이 꽉 찬 배추와 무 품종을 만들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전량 수입하던 것을 자급화시켰다. 제주도를 찾아가 감귤 재배를 적극 권유했다. 바이러스에 쉽게 감염됐던 강원도 감자의 품종을 개량해 세계적으로 우수하고 병이 없는 작물로 탈바꿈시켰다.


우리 토질에 맞는 개량 벼, 생명력 강한 꽃씨, 과일 대량 생산 등이 그의 손에서 이뤄졌다. 지금 한국인의 식탁은 우 박사가 거름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 박사의 제자인 김태욱씨는 “세종대왕에 이어 우리 농업을 과학적, 자주 자립의 단계로 도약시킨 이가 우장춘”이라고 했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에 처음으로 수정을 가한 세계적인 과학자였다. 당시에는 같은 종끼리만 교배가 가능하다고 믿었는데 1936년에 종이 달라도 같은 속(屬)의 식물을 교배하면 전혀 새로운 식물을 만들 수 있음을 밝혀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하면 유채를 만들 수 있다는 획기적인 연구였다. 세계 유전학계가 뒤집어진 것은 물론이다.


한국 정부는 최악의 식량난을 면하기 위해서는 일본에 있던 우 박사를 귀국시켜야 한다고 보고 ‘우장춘 박사 환국촉진위원회’까지 꾸렸다. 하지만 일본 정부 역시 그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우 박사는 어머니와 일본인 아내, 여섯 자녀를 모두 일본에 남겨놓고 밀입국이나 범법 외국인들을 강제 송환시키는 배에 억지로 올라타 1950년 3월 한국으로 왔다.


“나는 내 어머니의 나라 일본을 위해 일본인 못지않게 일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나라, 나의 조국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그런 후에 나의 뼈를 조국에 묻을 작정입니다.” 귀국 당시 우 박사의 소감이다.


한국 현대사의 중앙을 관통하는 인물은 피할 수 없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쿠데타로 집권한 그가 내세운 이른바 ‘혁명공약’에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민중들의 생활을 개선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민주주의라는 빛 좋은 개살구는 기아와 절망에 시달린 국민 대중에게는 너무나도 무의미한 것이다. 경제 개발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로 나서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의 말이자 생각이었다.


1962년 발표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정부 주도 발전 전략의 신호탄을 쏜 것이다. 1950년대 4% 안팎에 머물렀던 경제성장률은 1962~1982년 연평균 8.2%로 치솟았다. 1963년 농림수산업 취업자 비중 63.1%였는데, 1979년에는 1차산업 비중이 35.8%로 떨어졌다. 수백년이 걸리는 산업화 과정을 수십년으로 단축시킨 초압축 성장을 이끌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도 박 전 대통령이 밀어붙였다. 스스로 추진위원장을 맡으려 했을 정도로 공을 들였다. 일반적인 고속도로 아스팔트 두께의 절반에도 못 미치게 ‘날림’으로 공사가 이뤄졌지만 어쨌든 1970년 7월 완공됐다.


박 전 대통령은 외형적인 경제 성장을 이끌었지만 국민들의 피와 자존심을 팔았다. 1965년 한일협정을 조인했고 그 대가로 일본의 자본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 강점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사죄 없이 이뤄진 굴욕 외교였고 국민들의 격렬한 반대는 무시됐다.


한국은 베트남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보내기도 했다. 5000명이 넘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5만여명이 부상당했다. 물론 미국의 지지와 원조를 받는 조건이었다.

전태일 열사(사진=전태일재단)

전태일 열사(사진=전태일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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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대통령이 역사의 수레 위에 올라타 진두지휘했다면, 전태일 열사는 그 수레 바퀴 아래서 짓밟히는 서민들의 절규를 제 몸 불살라 고발했다. 그로부터 한국 노동운동이 본격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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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스스로 불을 붙인 22살 청년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치다 숨을 거뒀다. 당시 평화시장에는 12~13세 소녀들이 점심도 굶은 채 14시간 이상 일하면서 차 한 잔 값보다 조금 많은 70원의 일당밖에 못 받고 있었다. 근로기준법은 허울 뿐이었다. '한강의 기적'은 박 전 대통령보다, 인간 이하 취급을 받았던 숱한 노동자의 공으로 돌려야할 것 같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은 노동자들에게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1970년대에 2500개가 넘는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1970년대 말 원풍모방과 동일방직, YH무역 노조의 투쟁은 노동운동의 역사를 바꿔놨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1987년 6월항쟁 이후 7~9월 노동자대투쟁은 새 이정표가 됐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피어난 불씨가 결국 들불로 이어진 셈이다.


박철응 기자 her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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