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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성게알 김밥의 스웨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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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갑작스럽게 내려간 부산에서 첫 행선지로 정한 곳은 영도였다. 부산하면 떠오르는 자갈치시장도, 국제시장도, 해운대도 아닌 영도에 가기로 한 것은 비교적 한적한 바다를 보고 싶어서였다. 나중에 세보니 127만 명이 불꽃축제를 보겠다며 모여들었다는 광안리와 좀 떨어져 호젓하게 부산의 가을을 만끽해보겠다는 나름의 계획도 있었다. 일찍이 현인도 '굳세어라 금순아'에서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승달만 외로이 떴다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영도에서는 뭐랄까 그리움이나 외로움 같은 가을만의 정서가 느껴질 것 같았다.

부산역에서 508번 버스를 타고 초승달만 외로이 뜨기 한참 전인 12시께 영도다리를 건너 도착한 곳은 부산남고등학교 인근의 중리 해녀촌이었다. 바닷가에서 해녀 할머니들이 바로 손질해 파는 각종 해물을 저렴하게 먹을 수 있다는 사전 정보가 있었다.
과연 바닷바람 맞으며 넘실대는 파도를 보니 부산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입구부터 할머니들의 호객 경쟁이 만만치 않은데 그런 모습도 다 넘치는 인심으로 여겨질 정도로 가을 바다가 주는 느낌은 삽상했다.

서로 잘해주겠다며, 끝내주는 자리가 있다고 잡아끄는 할머니들을 가까스로 피해 가다 돌멍게를 서비스로 주겠다는 말에 혹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뿔소라와 성게알을 주문하니 해녀 할머니는 은근히 멍게와 해삼도 섞어 한 접시를 추가할 것을 권했다. 좀 많다 싶었지만 괜한 흥정이 모처럼 바닷바람 쐬는 이 기분을 망칠까 저어됐고 푸짐하게 차려놓고 여유롭게 바다를 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 짐짓 호기롭게 그렇게 달라고 했다. 맛의 절반은 이 풍광과 분위기가 책임지리라 믿으면서.

[초동여담]성게알 김밥의 스웨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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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성게알 접시를 받아들자 어디선가 다른 할머니가 다가와 김밥을 내미는 것이었다. 성게알에 김밥을 곁들여 먹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눈치였다. 둘러보니 너도나도 김밥에 성게알은 기본 메뉴인 양 다들 하나씩은 앞에 놓고 있었다. 알고보니 백종원씨가 이곳을 찾아 김밥에 성게알을 올려 먹은 장면이 방송됐다고 한다. 그 맛도 몹시 궁금했지만 이미 해물을 세 접시나 시킨 데다 김밥은 바다에서 난 것이 아닌데 굳이 여기서 먹을 필요가 있을까 싶어 정중히 거절했다.
해물의 맛은 새로울 것이 없었다. 다만 앞에 바다가 있고 해녀라는 할머니들이 막 손질해 썰어 주니 더 맛있다고 믿어볼 만은 했다.

한참 뿔소라를 씹고 있었는데 또 다른 한 할머니가 쓱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마치 '속사포 랩'처럼 쏟아낸 내용은 이렇다. 자신이 이 해녀촌 김밥의 원조인데 백종원이가 먹고 간 뒤 김밥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 너도나도 김밥을 판다. 심지어 직접 만들지 않고 다른 데서 김밥을 사와서 파는 얌체들도 있다. 지나가며 불과 몇 초 동안 중얼거린 얘기는 고스란히 귀에 들어왔다. 요사이 말로 '스웨그(swag)'가 넘쳤다. 내가 그 유명한 성게알 올려 먹는 김밥의 원조라는 으스댐과 그럼에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고 짝퉁에 만족하는 데 대한 한탄이 동시에 느껴졌다. 모르긴 몰라도 이런 게 힙합의 정신이지 싶었다.

진한 스웨그의 여운을 안고 해녀 할머니에게 물었다. 화장실이 어니냐고. 그러자 할머니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되물었다. 누가 쌀 건데? 천진하게 '제가요'라고 대답하자 할머니는 답답하다는 듯이 스웨그 가득 담아 내뱉었다. '아무 데나 싸라!' 아뿔싸, 이런 곳에 화장실이 따로 있을리 없는데 그까짓 남자 소변 사정 정도야 진즉에 알아서 아무 데서나 해결하지 못한 것에 순간 머쓱했고, 아무 데가 어디인지 당최 알 수 없어 당황했다. 아무 데를 찾아 두리번거리며 생각했다. 변변한 화장실조차 없는 건 매한가지였겠지만 방송이 뒤집어 놓기 전에 이곳은 더 좋지 않았을까. 죄다 방송에 나왔던 음식을 따라 먹기보다는 좀 더 운치 있게 여유를 가지고 이 가을 바다를 즐기는 곳이 아니었을까.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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