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이 되자 플라이셔는 오른손을 전혀 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피아노 연주를 포기하지 않았다. 모리스 라벨이 작곡한 '왼손을 위한 협주곡'처럼, 왼손만 가지고 연주하는 곡을 찾아냈다. 라벨과 프란츠 슈미트 등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 팔을 잃은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쓴, 왼손을 위한 작품이 적지 않았다.
2004년, 플라이셔는 뱅가드 클래식 레이블로 음반을 녹음한다. 타이틀은 '두 손(Two Hands)'. 바흐와 쇼팽, 드뷔시와 슈베르트의 곡을 연주한 음반의 재킷에 그의 두 손을 클로즈업한 사진이 실렸다. 그는 2006년과 2007년 우리나라에도 와서 연주회를 열었다. 그때 인터뷰에서 "두 손으로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병마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고백했다.
클래식 연주자에게 새끼손가락은 다른 어느 손가락 못지않게 중요하다. 새끼손가락이 지나치게 짧거나 약하면 연주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 원래 약한 손가락. 단련을 해야 다른 손가락 못잖게 힘을 낸다. 단지 다른 손가락과 대등한 역할을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악기를 연주할 때는 절대적인 역할을 해낸다.
바이올린 연주자 강주미(29) 씨는 열두 살이던 1999년 9월 농구를 하다가 왼손 새끼손가락을 다쳤다. 뼈가 부러졌다. 다니엘 바렌보임(74)이 지휘하는 시카고심포니와의 협연을 한 달도 남기지 않았을 때였다. 협연이 문제가 아니었다. 병원에서는 "바이올린을 다시 연주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실망하는 대신 노래를 부르고 복음성가를 작곡했다. 2년이 지나자 기적이 일어났다.
그는 "손가락이 부러진 덕에 세상을 많이 알았다. 만약 손가락을 다치지 않고 바렌보임과 협연했다면 굉장히 건방진 아이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천재성은 끊임없는 영감이 아니라 강인함을 통해 그 소유자를 드러낸다. 들리지 않아도 작곡하거나 연주할 수 있지만 의지를 놓으면 내면의 소리조차 들을 수 없게 된다. 기적은 응답이다. 공짜 기적은 없다.
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huhb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