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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 새끼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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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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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의 어느 날,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88)는 오른손에 이상을 느꼈다. 처음에는 새끼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더니 마비된 부위가 점점 번졌다. 1952년 열여섯 어린 나이에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제패한 천재. 의사는 그에게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1964년이 되자 플라이셔는 오른손을 전혀 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피아노 연주를 포기하지 않았다. 모리스 라벨이 작곡한 '왼손을 위한 협주곡'처럼, 왼손만 가지고 연주하는 곡을 찾아냈다. 라벨과 프란츠 슈미트 등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 팔을 잃은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쓴, 왼손을 위한 작품이 적지 않았다.
 1967년부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러면서 근육치료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고통스런 재활의 과정을 견뎌냈다. 마침내 1995년, 플라이셔는 두 손을 사용해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A장조(K414)'를 협연한다. 마비가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자면 '클래스는 영원했다'.

 2004년, 플라이셔는 뱅가드 클래식 레이블로 음반을 녹음한다. 타이틀은 '두 손(Two Hands)'. 바흐와 쇼팽, 드뷔시와 슈베르트의 곡을 연주한 음반의 재킷에 그의 두 손을 클로즈업한 사진이 실렸다. 그는 2006년과 2007년 우리나라에도 와서 연주회를 열었다. 그때 인터뷰에서 "두 손으로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병마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고백했다.

 클래식 연주자에게 새끼손가락은 다른 어느 손가락 못지않게 중요하다. 새끼손가락이 지나치게 짧거나 약하면 연주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 원래 약한 손가락. 단련을 해야 다른 손가락 못잖게 힘을 낸다. 단지 다른 손가락과 대등한 역할을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악기를 연주할 때는 절대적인 역할을 해낸다.
 피아노를 칠 때 가장 낮은 음(베이스)을 왼손 새끼손가락이, 가장 높은 음(멜로디를 이루는)을 오른쪽 새끼손가락이 친다. 그래서 두 새끼손가락이 피아노 선율 화음의 90%가량을 좌우한다.(안미현) 바이올린에서 손가락을 가장 많이 벌리는 음역은 '10도', '도'에서 시작해 그 다음 옥타브 '미'까지의 음역이다.(강수진) 새끼손가락이 너무 짧으면 이 음역을 커버하기 어렵다.

 바이올린 연주자 강주미(29) 씨는 열두 살이던 1999년 9월 농구를 하다가 왼손 새끼손가락을 다쳤다. 뼈가 부러졌다. 다니엘 바렌보임(74)이 지휘하는 시카고심포니와의 협연을 한 달도 남기지 않았을 때였다. 협연이 문제가 아니었다. 병원에서는 "바이올린을 다시 연주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실망하는 대신 노래를 부르고 복음성가를 작곡했다. 2년이 지나자 기적이 일어났다.

 그는 "손가락이 부러진 덕에 세상을 많이 알았다. 만약 손가락을 다치지 않고 바렌보임과 협연했다면 굉장히 건방진 아이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천재성은 끊임없는 영감이 아니라 강인함을 통해 그 소유자를 드러낸다. 들리지 않아도 작곡하거나 연주할 수 있지만 의지를 놓으면 내면의 소리조차 들을 수 없게 된다. 기적은 응답이다. 공짜 기적은 없다.

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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