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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훈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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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아빠의 직업을 'liar'라고 쓰는 어린 친구에게 선생님이 물었다. 이것은 직업은 아닌 거 같구나. 어린 친구는 말한다. "맞아요. 아빠는 법원에서 일해요." "그럼, lawyer겠구나. 존경할만한 아빠를 두었구나." 그런데 아빠는 정말 거짓말쟁이였다. 변호인이 승소할 수 있도록 적당히 스토리를 꾸미고 말을 맞추는 것에 도사였다. 아들의 생일잔치에 오겠다고 해놓고 오지 않는 아빠를 원망하며, 아이는 촛불을 끄기 전에 소원을 빈다. 아빠가 하루만이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해주소서. 그런데 이 소원이 이뤄져서 정말 아빠는 거짓말을 입밖으로 낼 수 없게 된다. 이후 생겨나는 온갖 소동과 파탄과 고통이 영화 '라이어 라이어'의 이야기다.

 회사에서 마주치는 이들에게 형식적으로 입발린 소리를... 했던 그는, "싸가지 없는 인간" "여드름쟁이" "밥맛" 따위의 진심을 내뱉으면서, 공공의 적이 된다. 게다가 변호는 엉망이 되어간다. 거짓을 내뱉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지만, 결국 튀어나는 것은 진실한 말 뿐이다. 자기 마음 대로 되지 않는 혀, 거짓말을 막아서는 입술. 코미디 영화이지만,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돌아보면, 나 또한 얼마나 상습적이고 복잡한 거짓말쟁이던가.
 거기다가 요즘 내 입이 내 마음을 자꾸 앞지르는 일이 있다. 이른바 훈계의 혓바닥이 춤을 춘다. 분위기를 바꾸려 무슨 이야기를 꺼냈는데, 뒤로 가면 일장연설의 훈계가 되어 있다. 내가 그렇게 교훈적인 인간도 아니고 가르칠 만한 콘텐츠를 많이 담고 있는 자도 아니건만, 입만 뗐다 하면 스스로도 잘 지키지 못하는 무엇을 해야만 인간이 된다고 압박을 하고 있다. 이거 정말 환장할 일이다. 나이가 들면 생기는 병인 것 같기도 하다. 나이가 많다고 저절로 높아지는 게 뭐가 있겠는가. 나이가 많아서 높아지는 거라면 나이를 먹으면 당연히 높아지는데 아직 나이를 덜 먹은 사람을 보고 뭘 요구할 게 있단 말인가.

 훈계란 대개, 두 사람 사이의 고도(高度)차이를 인식하는 데서 발생한다. 높다고 생각하는 쪽이 낮다고 생각하는 쪽을 향해 무엇인가를 교정하려는 발언을 쏟아내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저쪽이 특별히 낮을 일도 없고 내쪽이 높을 일도 별로 없건만, 무슨 근거없는 자부심이나 눈높이로 이런 썰을 푸는지 알 수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훈계의 결과이다. 어떤 일도 훈계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한다. 훈계를 하는 쪽에서는 당연히 뭔가 달라질 것을 기대하지만, 훈계를 받는 쪽에서는 '저 사람이 훈계를 하고 있구나'하는 상황 인식에 더 치중한다. 훈계의 내용은 접수하지 않거나 '또 한번의 훈계'로 접수할 뿐이다. 이것은 결코 소통이 아니다. 훈계의 콘텐츠는 닿기도 전에 증발되고 훈계의 형식이 남아 상하관계의 이물감같은 것을 적재한다. 재미없음에도 불구하고 끈덕지게 유통되는 수많은 훈계들은, 듣는 이들을 위한 충심에서 나오는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요즘의 내 혓바닥을 살핀다면, 그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온 실언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살피지 못한 결과로서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실언은 물처럼 엎질러지고 헛소리는 바람처럼 흩어진다. 내가 하는 훈계들이 바꾸는 건 듣는 이의 태도나 각오가 아니라, 소음의 총량 증가밖에 없다는 사실. 훈계가 튀어나오느니 짐 캐리처럼 입을 쥐어뜯는 게 낫다. 웃어는 줄 것이다.

빈섬(이상국 디지털뉴스룸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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