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영화감독 데니 보일의 1995년 데뷔작인 ‘쉘로우 그레이브(shallow grave)'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 3명이 주인공이다. 의사, 기자, 회계사인 이들은 방을 하나 세 놓으면서 까탈스럽게 새 입주자를 고른다. 그렇게 고른 입주자가 이사 온 다음 날 자신의 방에서 거액의 돈 가방을 남기고 숨진 채 발견된다. 친구 3명은 시체를 유기하고 돈을 나눠 갖기로 한다.
영화를 볼 당시가 수습기자 딱지를 막 뗐을 때여서 그랬는지 주인공 3명 중 가장 바쁜 인물로 그려진 직업이 회계사였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회계사 친구에게 영화 얘기를 했더니 “회계법인에서는 회계사들 월급 뽑으려고 일을 엄청 시킨다”면서 “한국은 감사 수수료가 싸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회계법인이 적자가 난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의 우환(憂患)이 된 조선, 해운 구조조정 과정에서 회계법인 책임론이 불거지는 걸 보면서 오래 전 봤던 영화와 회계사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감사 수수료를 대폭 올려줬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까. 이른바 ‘빅4 회계법인’에서 근무하는 회계사 몇 명에게 물었더니 대답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수수료를 올려주면 좀 더 많은 회계사를 투입할 수 있어서 자세히 볼 수는 있겠지만, 해당 기업이 존속가능한지에 대해서 ‘불투명하다’는 감사의견을 내놓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감사를 하는 회계사들은 갑(甲)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감사 용역을 발주하는 기업과 이를 수주하는 회계법인의 관계는 갑과 을의 위치가 바뀐다. 기업 감사를 담당하는 회계사들은 자신들을 갑과 을의 중간이라고 해서 ‘갈’이라고 한다. 감사를 받는 기업이 회계감사인을 지정하는 ‘자유수임제’가 지속되는 한 갑과 을의 위치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회계사들 역시 ‘갈’이 될 수밖에 없다.
황진영 기자 you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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