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화법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믿음'이다. 대화를 통해 상대의 믿음을 확인하고 합의 처리한다는 게 선진화법의 작동 원리인 것이다. 하지만 지난 4년의 경험에서 확인한 것은 불신이었다. 상대방를 믿지 못하니 대화나 타협은 불가능했다. '정치권이 선진화법에서 거둔 성과는 결국 불신일 뿐'이라는 자조섞인 반응까지 나올 정도다.
19대 국회의 불신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쟁점 법안 처리를 위한 여야 합의는 야당의 입장 번복에 손바닥 뒤집 듯 파기됐고 여야가 팽팽히 맞서는 또 다른 법안의 경우 여당이 일부 조항을 삭제하겠다는 입장에도 불구하고 야당이 믿지 못해 의견접근을 이루지 못하는 실정이다.
야당의 제안을 여당이 믿지 못하는 정반대의 사례도 있다. 2014년 법안의 빠른 처리를 위해 야당은 상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복수로 두자고 제안했지만 여당은 반대했다. 야당이 상임위내 모든 법안소위의 위원장을 여당이 맡아도 된다고 밝혔지만 여당은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여야 지도부 모두 서로를 향해 "믿지 못할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입에 달고 지낼 수밖에 없다.
정치권에서 신뢰가 사라졌다는 뜻은 의미심장하다. 사회 곳곳에 영향력을 미치는 정치가 불신의 장이 된다면 개인 역시 영향을 받을 게 뻔하다. 사회를 믿지 못하는 개인은 정치와 정책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스스로를 보호하는데 열중한다. 이는 비리와 부정부패로 이어진다.
불신이 야기하는 사회적 대가(代價)는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규모를 무시할 수 없다. 2014년 한 연구기관은 불신과 갈등의 사회적 비용이 최대 246조원에 달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한해 예산의 3분의2에 달하는 막대한 규모다. 그리고 국회 역시 이런 비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마한 비용 보다 우려스런 점은 또 있다. 이대로 가다간 20대 국회 역시 19대 국회와 다를 바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무기력한 국회가 눈앞에 선하다.
최일권 기자 ig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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