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레베카' 장은아, 그녀가 대타인지 잊었다
8년 무명가수, 2년 전 같은 역할 오디션에선 떨어져
연습 3주밖에 못했지만 노래, 대사 완벽 암기
부족한 연기력은 자신만의 캐릭터 분석으로 극복
킬링 넘버 '레베카'의 고음도 인상적
[아시아경제 임온유 기자] 뮤지컬 배우 홍광호(34), 주원(29), 김준수(29). 톱스타 세 사람은 놀랍게도 한때 누군가의 '대타'였다. 홍광호는 2006년에 한국에서 초연한 '미스 사이공'에서 주연 크리스와 조연 투이의 커버 배우(출연 배우가 사고 등으로 인해 출연할 수 없을 경우 대신 무대에 서는 배우)를 맡았다.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제작자 캐머런 매킨토시는 2014년 미국 브로드웨이판 '미스 사이공'의 투이 역에 홍광호를 캐스팅했다.
주원은 2009년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주인공이 다치는 바람에 대타로 출연했다. 그는 지금 드라마 '용팔이', '굿 닥터', '각시탈'의 주연을 꿰차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김준수는 2010년 '모차르트!'로 뮤지컬계에 발을 들였는데, KBS의 예능 프로그램 '출발드림팀'을 촬영하다 다친 조성모(39) 대신이었다.
우연한 기회가 새로운 삶의 여정을 펼친 셈이다. 물론 이들의 욕심과 실력이 부족했다면 기회가 행운이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뮤지컬계에서 스타 탄생을 예고한 대타 출연자가 또 한 명 있다. '레베카'에 댄버스 부인으로 출연하는 장은아(33)다. 그는 지난해 12월 중순 후두염 때문에 하차한 김윤아(42) 대신 역을 맡았다.
'레베카'는 전 부인 레베카의 죽음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막심 드 윈터, 죽은 레베카를 숭배하며 맨덜리 저택을 지키는 집사 댄버스 부인, 사랑하는 막심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댄버스 부인과 맞서는 '나'의 이야기다.
옥주현(36), 차지연(34), 리사(36), 신영숙(41)…. 역대 댄버스 부인의 이름이다. 화려하다. 실력과 카리스마를 인정받은 명실상부 정상급 배우들이다. 댄버스 부인은 남녀 주연보다 분량은 적지만 극을 이끄는 실질적인 역할을 해 여배우들이 탐내는 역할이다.
지난 12일 장은아가 첫 공연을 마쳤다. 성공적이었다. 킬링 넘버 '레베카'에서 망설임 없이 쭉 뻗어 나온 고음은 무뚝뚝하던 중년 남성들의 환호와 박수를 끌어낼 정도로 강렬했다.
지난 20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장은아를 만났다. 그는 "부담감 때문에 밥을 못 먹어서 4㎏이 빠졌다"고 했다. 첫 공연을 마치고는 긴장이 풀려 감기 몸살에 걸렸다. 인터뷰를 할 때는 막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장은아는 "공연 전 연습에 참여하지 못해서 극에 녹아들지 못하고 튀면 어쩌나 불안했다"며 "한 번이지만 실제 공연해 보니 감이 좀 생긴 것 같다"고 했다.
장은아는 김윤아가 하차한 뒤 제작사 EMK의 오디션 제의를 받고 '레베카'를 부른 영상을 보냈다. 그는 "합격 통보를 받고 실제 무대에 오르기까지 불과 3주 남짓 시간이 있었다"고 했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에도 노래와 대사를 완벽히 익혔다. 사실 장은아에게 댄버스 부인은 낯설지 않은 역할이었다.
그는 "2년 전 같은 역으로 오디션을 본 적이 있지만 떨어졌다. 친한 리사 언니의 공연을 보고 작품의 매력을 느꼈고 '레베카' 넘버를 꾸준히 연습해왔다. 운 좋게도 나름대로 노래를 완성해가는 시점에 오디션 제안이 들어왔다"며 "꿈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장은아는 합격 소식을 듣고 "솔직히 얼떨떨했고 '생각보다 빨리하게 됐네'하며 덤덤해하기도 했다"고 했다. 그의 담담함 뒤엔 8년이라는 오랜 무명 가수 생활 동안 다진 단단한 마음이 있었다.
장은아는 추계예술대학에서 판화를 전공한 미술학도였다. 학내 가요제에서 금상을 받은 뒤 드라마 배경음악을 제작하는 데 참여하며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껏 노래할 수 있을 만큼 일이 많지 않았다. 그는 "좋아하는 것과 잘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민한 시기였다"고 했다. "불안한 마음에 미술대학원에 들어갔지만 내 목소리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그러던 중 노래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보이스 코리아'에 출연했다. 같은 팀이던 뮤지컬 배우 허규(38)가 뮤지컬 '광화문연가'의 이지나(52) 연출가에게 장은아를 소개했다. 장은아는 그렇게 뮤지컬 배우로서 첫 발을 디뎠다. 이후 '서편제', '머더발라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등에 출연했다.
뮤지컬 배우와 가수의 세계는 너무나도 달랐다. 장은아는 "카메라 화면은 자를 수 있지만 무대는 온 몸을 다 보여줘야 한다. 발걸음, 손짓 하나까지도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가야 하기 때문에 현대무용을 배우며 몸 쓰는 법을 익혔다"고 했다.
연기 밑천이 없기 때문에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전사(前事)'를 짓는 독특한 방법을 쓰기도 했다. '레베카' 악보 앞에 댄버스 부인의 과거사를 떠오르는 대로 빼곡히 적었다. 댄버스 부인은 죽은 레베카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안주인을 해치려 음모를 꾸미는 인물이다. '레베카의 신임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 받아온 여인'이란 소개가 있지만 그의 행동에 선뜻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장은아는 여기에 살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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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아 출신인 댄버스 부인이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레베카의 하녀로 살며 함께 커간 상상을 했다. 그는 레베카라는 창문을 통해 남자를 보고 세상을 봤을 것이다. 아름다운 레베카가 주위 사람들에게 시달리며 성장한 사실을 알기에 남자를 한낱 노리개로 여기는 그의 생각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장은아는 "관객이 부족한 내 연기 경험을 봐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며 "나름대로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고 덧붙였다.
"댄버스 부인을 맡으면서 한 단계 성장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내가 있는 지점이 어디쯤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 이룬 것이 아니다. 배우는 늘 선택당하는 것이 숙명이다. 그러니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오랜 무명생활 경험을 통해 자만심과 자신감의 경계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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