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백우진 기자] “전쟁 발발 사실이 조정에 알려진 1592년 4월 17일, 순번사로 임명된 무장 이일은 한양의 정예병사 300명을 선발해 거느리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병조에서 선발한 병사들은 대부분 집에서 생계에 종사하던 사람들이거나 아전 또는 유생들이었다. 이들을 불러모아 점검하자 관복 입고 옆에 책을 낀 채로 나온 유생, 평정건을 쓰고 나온 아전 등 다들 병사로 뽑히기를 꺼리는 자들로 뜰이 가득했다.


이런 까닭에 이일은 명령을 받은 지 사흘이 지나도록 출동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이일이 먼저 떠나고 후에 별장 유옥이 병사들을 이끌고 뒤를 따르기로 했다.” (유성룡, 징비록 中)

부산진성 전투. 사진= KBS 사극 '징비록'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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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은 단편적이지만 조선 병력이 육지로 침공한 일본군 약 16만명을 대적하기에 턱없이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일본 육군은 다음과 같은 9번대(番隊)로 나뉘어 조선을 공격했고 병력이 모두 15만8700명에 달했다. 이는 수군과 지원 병력을 제외한 숫자였다.


제1번대는 주장 고니시(小西)가 이끄는 1만8700명이었고 제2번대는 주장이 가토(加藤淸正)로 병력 2만2800명, 제3번대는 주장 구로다(黑田長政) 병력 1만1000명, 제4번대는 주장 모리(毛利吉成)ㆍ시마즈(島津義弘) 병력 1만 4000명, 제5번대는 주장 후쿠시마(福島正則) 병력 2만5000명, 제6번대는 주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 병력 1만5000명, 제7번대는 주장 모리(毛利元之) 병력 3만명, 제8번대는 주장 우키다(宇喜多秀家) 병력 1만명, 제9번대는 주장 하시바(羽柴秀勝) 병력 1만1500명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中)

조선의 전체 병력은 얼마나 됐을까. 임진왜란이 나고 2년 후인 1594년 유성룡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을 보면 현역군인 수는 7920명이었다. 전투에서 병력을 다수 상실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조선이 유지한 현역군인 수는 이보다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송복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中)


비교자료는 ‘경국대전’(1469년)에 기재된 중앙부를 지키는 병사의 수다. 경국대전은 이 숫자가 7560명이라고 기록했다. 유성룡의 상소문에는 현역군인 7920명 중 중앙을 지키는 병력이 4640명이었다. 이로 미루어 임진왜란 발발 120여년 전에는 현역군인이 약 63%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이 비율을 적용하면 조선시대 현역군인 수는 1만2900여명이라는 추계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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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의 상소문을 보면 현역군인 외에 명단에 기재된 군인은 4만명 정도였다. 또 보(保)나 봉족(奉足)으로 불린 보조군은 12만명이었다. 그러나 율곡 이이가 전쟁 전 상소문을 올려 보고한 것처럼 조선 군적에는 허수가 너무 많았다. 실제 동원 가능한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누구도 알 길이 없었다.


유성룡은 1592년 8월 5일 보고서에서 “(평양~안주 사이의 요충지인) 순안의 총대장이 거느린 군사가 수천명밖에 되지 않는다”며 “그것도 과반수가 쓸모 없는 병사”라며 한탄했다.


백우진 기자 cobalt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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