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구글을 열어보다 깜짝 놀랐다. 로고 디자인에 오드리 헵번의 얼굴이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오드리 헵번이 탄생한 날이다.
1929년 5월4일 그녀는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국인이었고 어머니는 폴란드인이었다. 4살 때 영국으로 건너갔고, 6살 때 런던 인근의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다녔으니 영국인이라 할 수도 있고, 2차대전 이후엔 부모가 이혼하여 어머니의 고향인 폴란드에 살았으니 폴란드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후 그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모델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녀를 행운의 방석에 올려놓은 연극 '지지'는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었고, 이 무대를 지켜본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로마의 휴일'에 그를 캐스팅하여 대성공을 거뒀으니 미국의 스타이기도 하다. '로마의 휴일'은 그녀의 세계적인 '배경'을 활용하여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유럽의 곳곳을 그녀의 뒤에 비쳐준다. 영화와 관련한 기자회견에서 헵번은 네덜란드어로 몇 마디를 말하면서 자신이 유럽인임을 과시한다. 이 영화로 그녀는 1953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벨기에, 영국, 폴란드, 네덜란드와 미국의 언론들은 이 여인이 각기 자기나라의 스타임을 강조하려고 애썼다. 5개국어(영어, 불어, 벨기에어, 폴란드어, 네덜란드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던, 그녀는 그러나 그 이상이었다.
그녀의 별칭은 '세기의 연인'이다. 그 외에도 물론 많다. 타락할 수 없는 마음을 지닌 연약한 성인, 다치기 쉬워 보이나 섬세한 우아함을 지닌 여인, 멍해질 만큼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나는 여인, 패션 아이콘, 영원한 박애주의자, 청춘과 청순 그 자체.
오드리 헵번은 폴란드에서 나치 치하의 고통스런 생활을 경험했다. 1959년 '안네의 일기' 캐스팅을 거절한 것은 그 트라우마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전쟁 동안 그녀는 튤립의 뿌리를 먹으며 연명했다고 털어놓았다. 이 때문에 나중에 거식증을 겪기도 한다. 튤립은 그녀와 인연이 많다. 헵번이 여생을 보낸 도시 스위스 모르쥬(Morges)는 튤립공원(랭데팡덩스공원)으로 유명한 도시이다. 십만 송이가 넘는 그 알록달록한 꽃들을 보며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1990년엔 튤립의 한 품종이 '오드리 헵번'이란 이름을 갖게 되기도 했다.
구글이 올린 저 사진은 터키 작가인 유섭 카쉬(Yousuf Karsh, 1908-2002)가 1956년(헵번 나이 27세)에 촬영한 작품이다. 살짝 내려뜬 눈에 강조된 속눈썹과 곡선으로 떨어지다 오뚝하게 돋아오른 콧날, 단아하고 정갈해보이면서 내면을 지닌 입술, 곱게 빗어넘긴 머리와 뒤로 뭉쳐 씩씩함을 강조한 스타일, 목까지 올라오는 긴 깃으로 특유의 고독감과 여린 귀여움을 강조한 패션까지, 인류의 미적 표상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인상적인 이미지이다. 페북의 한 벗은 이 이미지를 아예 자신의 프로필 사진으로 걸어 쓰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헵번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이런 얼굴을 가지고 영화에 출연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나의 외모는 쉽게 따라할 수 있거든요. 머리칼을 뒤로 틀어올리고 큼직한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작은 민소매 드레스만 입으면 헵번룩이 될 거예요."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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