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뜬 구름만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나는 편지를 봉하여 구름 편에 보내려 하나/바람은 빨라 내 말을 들으려 돌아보지도 않네/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다른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해가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가 없으니/누가 내 고향 계림으로 나를 위해 소식 전하리."


신라 승려 혜초가 쓴 시다. 운율과 정조가 완벽할 만큼 시적 성취가 뛰어나다. 이런 시를 두고 우리가 학교에서 '혜초-왕오천축국전'을 별 감흥 없이 배웠다는게 씁쓸하다. 그러나 혜초를 다시 만나면 인간의 깊이, 세계 문명사적 의미에 대해 더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혜초(704~787)는 열 여섯살 때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열 아홉 나이에 중국 광저우를 출발, 파라사국(인도네시아)을 거쳐 천축(인도)으로 건너가 석가모니의 성지를 순례했다. 천축으로 가는 길은 바닷길이나 육로 모두 험난했다. 당시 여러 기록에는 중도 탈락자, 사망자가 속출했다고 한다.일연은 '삼국유사'에 "천축의 머나먼 길 만첩산인데, 가련하구나. 힘써 올라가는 유사들이여. 몇번이나 저 달은 외로운 배를 보냈는가. 한사람도 구름 따라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 했다"고 적었다. 혜초 전후로 수많은 신라 유학승이 천축행에 도전했으나 귀환한 사람에 대한 기록은 없다.


혜초는 석가모니 성지를 순례한 스무살부터 4년동안 다섯 천축국과 서역을 더 여행한다. 사실 이는 여행보다는 귀환을 목적으로 한 여행이다. 혜초가 지나간 나라는 다섯 천축국을 비롯, 이란, 이라크, 시리아, 우즈베크스탄, 카자흐스탄, 러시아, 동로마제국 등 40여 개 나라다. 천축국- 러시아 -중국 장안에 이르는 귀환길은 총 1만5000여 km다. 비단길, 초원길과도 연결되며 눈덮힌 파미르고원, 타클라마칸과 고비시막, 천산 산맥 등 인간 한계를 뛰어넘는 공간과도 만난다. 추위와 굶주림, 호랑이나 늑대같은 맹수들. 끝없는 평원, 거친 산맥을 넘는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또한 혜초에게는 지도도 나침반도 없었고, GPS는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오로지 정신만으로 길을 찾아야하는 여정이다.

혜초는 어린 나이에도 엄청나게 용감하고, 강인했던 모양이다. 아니, 그런 정도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고행의 위대함보다도 혜초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해가는 과정은 상상하기가 어렵다. 혜초의 신념이 완전한 불심에 이르렀다고 해도 그럴 것이다. 하여튼 범인의 머리로는 측량이 불가능하다. 실로 혜초는 인간 정신의 극치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혜초의 고행, 순례는 가히 인간계를 넘어 신계(神界)에 닿는다. 오히려 부처도 한 수 접어줄 지도 모른다. 혜초는 순례자의 길을 하염없이 걸어 수많은 인류 문명과 조우했다. 또한 국경과 문명뿐만 아니라 사상, 인간, 종교의 경계를 넘었다. 혜초가 넘은 것은 또 있다. 혜초는 그의 시간과 문명, 고행의 세계를 가지고 1300여년을 넘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른다. 혜초와 우리가 만나는 지금까지 혜초가 걸은 시간과 거리는 우리에게 숱한 영감을 준다.


혜초의 대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은 오늘날 '동방견문록', '이븐 바투타 여행기', '동유기' 등과 함께 세계 4대 여행기로 불린다. 사실 4대 여행기라는 건 냉정한 평가는 아니다. 1대3 정도로 보는게 타당하다.


1908년 2월. 프랑스의 젊은 동양학자 폴 펠리오(1862~1943)가 중국 신장성 둔황 석굴에서 책 제목도, 저자 이름도 알 수 없는 두루마리 형태의 필사본 한 권을 발견, 파리로 가져온다. 폴은 신라 승려 혜초가 지은 여행기로 확신한다.


이를 1938년 독일의 동양학자 발터 폭스(1902∼1979년)가 번역하면서 비로소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세상에 드러난다. 발터는 "인도, 아프가니스탄, 동로마제국 및 러시아 일대를 순례한 혜초는 마르코폴로에 500년 앞서 비단길을 개척한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혜초의 순례길은 역사 상 유례가 없다. 전기에는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 방향, 머문 지역의 지배자와 언어, 관습, 풍토, 왕이 소유한 코끼리, 종교 등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즉 혜초는 동서양 문명의 기록, 전달자로 인류문명 교류사에 있어서 가장 획기적인 개척자다.


실로 혜초는 승려이기에 앞서 대여행가 이자 인류 문명탐험가라해도 틀리지 않는다. 혜초는 마르코폴로 등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마르코폴로에게는 동행할 지원부대, 낙타가 있었지만 혜초는 누구의 조력도 받지 않고 혼자서 탐험과 고행을 치렀다는 점이다.


열아홉 혜초가 중국-파라사국(인도네시아)-인도에 이르는 뱃길은 또 어떤가 ? 훗날 중국 명나라 정화의 원정대가 이동한 동방해상로다. 혜초는 동서양 문명의 대 이동로인 동양 해상로인 '정화의 항로'와 '비단길'을 동시에 건넌 유일무이한 사람으로 평가할만 하다. 여행하는 동안 혜초는 결코 서두르지 않고, 느린 걸음으로 일관되게 걸어 나갔다. 또한 말이 통하는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 모두를 만나 대화하며 세상을 기록해 나갔다.


"헌데 왜 혜초는 그 먼 길을 우회했을까 ?" 그것이 당시 살아서 돌아올 가능성이 가장 높은 길이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우선 혜초가 상정할 수 있는 길이 대체로 네갈래다. 첫번째 애초에 서역으로 갔던 해상길이다. 그러나 풍랑과 당시의 항해술로는 다시 살아서 귀환한다는 보장이 없다. 특히 계절풍이 있어야 한다. 해상길 이동 시 혜초가 일년간 파라사국에 머물렀던 이유도 열대 기후 적응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도로 갈 수 있는 계절풍을 다시 기다려야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거꾸로 이동할 때는 계절풍은 커녕 태풍이라도 만난다면 끝장이다.


둘째 방글라데시를 거쳐 태국 등 인도차이나반도를 지나는 남방을 돌아오는 방법이다. 그러나 당시는 길이 열려 있지 않았다. 열대 우림을 지나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번째는 고준 영봉이 즐비한 히말리야 산맥과 티벳, 타칼라마칸 사막 한복판을 건너는 길이다. 도상 거리로는 가장 가깝다. 7000여m나 되는 산맥을 넘는다해도 그 다음부터는 만년설 지대인 파미르고원과 타칼라마칸 사막이다. 타칼라마칸 사막은 동서 1000km, 남북 400km다. 그러나 사막 한복판은 섭씨 50도가 넘는 폭염이 도사린다.


맨 마지막 이동로는 인도 서쪽의 아프가니스탄으로 가서 비단길-초원길을 찾아가는 루트를 상정할 수 있다. 이미 비단길은 중국 한나라 때부터 중동, 로마제국까지 연결돼 물자와 문명이 흘렀으며 폐쇄와 개방이 반복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초원길은 우리 민족이 유라시아대륙을 건너 동방에 이른 길이므로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길이다.


어느 길로 찾더라도 서쪽으로 이동해 북방으로 향하기만 하면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 비록 길게 우회하는 길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물론 히말리야 산맥이나 파미르, 고비, 타칼라마칸 사막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다만 이전에 사람과 문명이 흐르는 흔적이라도 찾아가면서 이동할 수 있다면 생존 확률이 있었고, 혜초는 그 길을 열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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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비단길을 걸어온 사람이 있다. '나는 걷는다'의 저자인 베르나르 올리비에라는 전직 기자다. 그는 30여년간 '르 피가로' 등에서 정치부 기자, 사회ㆍ경제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그는 은퇴 후 환갑이 넘은 나이에 이스탄불에서 중국의 시안까지 4년동안 1만2000km라는 거리를 걸었다. 그러나 혜초와는 달리 겨울에는 파리로 돌아갔다가 날씨가 풀리면 다시 걷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걷는다고 할 때 '길'이란 '인생'혹은 '운명'이란 뜻이기도 하다. 단순히 인마와 운송수단이 지나다니는 공간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수많은 표지판과 이정표를 따라 걷는데 익숙해져 있다. 휴대폰, 컴퓨터 등 문명의 한복판을 걸으며 도전과 모험을 잃었다. 혜초를 보면 길이 생로병사의 과정속에서 단순히 '세월'이라는 시공간을 지나는 '인생의 여정'만은 아닌게 분명하다. 비단길, 초원길과 정화의 항로인 '동방해상로'를 열었던 위대한 개척자인 혜초를 생각하며 걸으러 가까운 강변이라도 나가봄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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