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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삶을 품고 있는 100개의 방, '인생사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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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삶을 품고 있는 100개의 방, '인생사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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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수진 기자]조르주 페렉은 현대 프랑스 문학의 기이하게 빛나는 별이다. 페렉은 프랑스의 실험문학그룹 울리포(Oulipo)의 일원으로 1965년 첫 소설 '사물들'을 내놓고 15년 남짓한 창작기간동안 끊임없는 실험을 거듭했다. 문학의 영역을 계속 확대해나간 그의 작품들 중에서 '인생사용법'은 대표작으로 꼽힌다.

'인생사용법'은 99개의 이야기가 쌓아올린 구조물이다. 페렉은 작품 속 배경을 100개의 방이 있는 아파트로 설정했다. 작품의 각 장마다 하나의 방이 짝지어지며 그 방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담는다. 각 장이 중복 없이 하나의 방을 묘사해야 하며 순서 또한 우연의 산물로 유도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페렉은 구성 과정에 체스의 행마법을 도입한다. 건물의 단면도를 체스판으로 상상하고 가상의 체스말이 중복을 피하며 단 한 번만 지나가도록 한 것이다. 독자는 체스말의 움직임을 따라 아파트의 99개 문을 열어 보는 '탐험'에 동참한다.
페렉은 전업작가 생활을 시작하기 전 국립과학연구센터 신경생리학 자료조사원이자 파리 생앙투안 병원의 문헌조사원으로 일했다. 이 '과학'에 대한 감각은 페렉의 묘사에도 이어진다. 페렉은 렌즈의 심도를 바꿔가며 방 안의 거의 모든 것을 냉정하게 포착해낸다. 낡은 안내장, 빛바랜 명함도 원래 만들어진 모양새와 서체 그대로 책 장에 놓여 있다. 버려졌던 것, 잊혀졌던 것을 일일이 불러내 눈 앞에 세워 놓는 99개의 이야기는 서사가 아닌 묘사를 주축으로 하는 변종된 '천일야화'다.

철저히 계산된 작법으로 탄생한 '인생사용법'의 미덕은 사실 무엇보다도 재미있다는 점이다. 타인의 삶을 그들 자신보다도 가깝게 들여다보는 염탐의 쾌감은 책장을 끝까지 넘기게 만든다. 페렉은 100개의 방 중 99개만을 열어주고 하나는 남겨 놓았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영국인 바틀부스는 500개짜리 퍼즐을 끝까지 맞추지 못하고 439번째 조각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남겨놓은 빈 자리는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가장 큰 경이로 다가온다. 이 공백이야말로 '삶'을 완성시키는 결정적 카드다. '인생사용법'은 그토록 죽음을 선고받았던 문학이 아직도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이 책은 문학동네가 기획한 페렉 선집의 제2권으로 출간됐다. 선집을 기획한 문학동네 고원효 인문부장은 "문학과 인문학의 경계에 있는 작가들의 선집을 '인문서가에 꽂힌 작가들'이라는 시리즈로 내놓고 있다"며 "페렉은 이 시리즈를 구상하며 가장 먼저 염두에 둔 작가"라고 말했다. 표지를 비롯한 디자인은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디자이너 듀오 '슬기와민'이 맡았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페렉 연구로 프랑스 8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김호영 한양대 교수의 번역도 흠잡을 데 없다.


김수진 기자 sj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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