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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철인' 김기동, 그는 아름다웠다(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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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철인' 김기동, 그는 아름다웠다(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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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투데이 김흥순 기자]김기동(40). 포항스틸러스 전설의 미드필더가 지난 해 연말을 앞두고 정들었던 현역생활을 마감했다. 그의 이름 석자는 프로축구의 역사였다. 올 해로 30해 째를 맞는 K리그에서 그는 21시즌을 함께했다. 12명의 감독을 거쳤고 필드플레이어로는 최초로 통산 501경기에 출전했다. 화려한 스타로서의 삶은 아니었지만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연습생 출신으로 프로에 입문해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 살아왔다. 철저한 자기 관리로 부상과 시련을 딛고 일어섰다. 그런 그에게 팬들은 ‘작은 거인’ 혹은 ‘철인’이란 칭호로 화답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철인의 질주는 막을 내렸다. 김기동은 트레이드마크인 등번호 6번을 남기고 이제 인생 2막의 출발점에 섰다.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어 보이는 순간에도 그는 현역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순탄치만은 않았던 선수생활을 그토록 끈질기게 붙잡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달 27일 김기동이 나고 자란 고향 충남 당진에서 그를 만나 진솔한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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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조롭지 않은 출발
김기동은 당진 송악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다. 전문코치도 없이 체육선생님이 지도하는 축구부였다. 처음 그가 맡은 포지션은 센터포워드. 체계적인 훈련도 없이 첫 출전한 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곧바로 도 대회를 나갔는데 2차전에서 혼자 6골을 넣었어요. 우리가 성적을 내기 시작하니까 대전시에서 전문 코치를 데려다가 체계적인 훈련을 시켜주더라고.”

김기동은 축구 명문이던 대전 동중으로 진학을 희망했다. 그러나 홍성에 있던 홍주중학교 축구부에서 창단 멤버로 그를 스카우트한다. “그렇게 맞아 본 적은 처음이에요. 3학년들이 이유 없이 때리는 거죠. 한 4-5개월을 맞는데 너무 힘들더라고. 안 되겠다 싶어서 망치로 내 무릎을 때린 적이 있어요. 운동 안하려고. 근데 엑스레이 찍어도 이상이 없었어요.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어서 축구부 그만두고 전학을 갔죠.”

송악중학교로 옮긴 김기동은 공부에 매진했다. 성적도 나름대로 괜찮았다고 한다. 대도시로 고등학교 진학을 바랐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이 당시 같은 재단이던 송악고등학교로 보내시려고 그랬어요. 고민을 많이 했죠. 그 쪽으로 가기는 싫고.”
갈등의 순간 잊고 있던 축구와의 인연이 다시 시작된다. “당시 당진에 있는 신평중학교에서 축구부를 창단했어요. 전에 몇 번 시합을 한 적이 있는데 나보고 계속 축구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부모님 찾아와서 설득도 하고. 송악고등학교는 가기 싫어서 고민하다가 결국 1년 유급을 하고 신평중학교 축구부로 들어갔어요. 그래서 사회 친구들은 71년생이고 축구부 친구들은 72년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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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남기 위한 전쟁

중학교를 1년 더 다니고 신평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김기동의 축구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대학 진학도 좌절됐다.

“대학에 가려면 4강 이상의 성적이 필요했어요. 실력은 괜찮았는데 항상 8강에서 떨어졌죠. 상비군 티켓이라는 게 있었는데 한 명만 대학에 갈수 있대. 내가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생각해보니까 마음이 그렇더라고. 결국 다른 친구한테 양보했어요.”

당시 포항제철에서 입단 제의가 왔다는 감독의 말에 김기동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프로입단을 결심한다. 그러나 정식 입단이 아닌 연습생 신분이었다. 한 달간의 테스트를 거쳐 1991년 어렵게 프로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포항에는 이흥실, 최순호, 변병주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있었어요. 나는 체격이나 모든 조건이 준비가 안됐지. 체력테스트도 꼴찌였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던 거 같아. 이를 악물고 버텼어요. 1년 쯤 지나니까 지구력이 어느 정도 올라오더라고. 목표 같은 건 없었어요. 살아남으려고 한거지. 축구밖에 배운 게 없는데 거기서 밀리면 갈 때는 군대밖에 없었으니까.”

그의 연습생 시절은 서러웠다. 1년 차 월급은 80만원. 그나마도 2년차는 메리트시스템(성과급제)이 도입되면서 월급이 60만원으로 줄었다고 했다. 92년 포항에서 우승을 경험했지만 김기동이 설 자리는 없었다. 정식 경기에는 한 게임도 뛰지 못하고 93년, 당시 유공으로 둥지를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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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초에 포항에 감원바람이 불었어요. 그때 유공에서 박성화 감독님이 괜찮은 미드필더를 보내달라고 했나봐. 내가 추천을 받았는데 바로 계약도 아니고 또 테스트를 받아야 했어요. 두 경기를 죽기 살기로 뛰다가 내측 인대 부상을 당했어요. 끝났구나 생각하고 포기했는데 감독님이 계약을 해주시더라고.”

어렵게 기회를 잡은 김기동은 니폼니시 감독 부임 이후 축구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니폼니시 감독이 오고 팀에 변화를 많이 줬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소위 ‘뻥축구’에 맨투맨 시스템이 대세였는데 처음으로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고 지역방어 개념도 생겼지. 선배들은 새로운 축구에 적응을 못했어. 자연스럽게 나를 비롯해 젊은 선수들한테 기회가 생겼죠.”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김기동은 98프랑스월드컵 예선 당시 차범근 감독의 부름을 받아 생애 첫 국가대표에도 이름을 올린다. 교체출전을 포함해 A매치 3경기를 치렀지만 평가는 냉혹했다.

“그 때 대표팀이 ‘도쿄대첩’에서도 이기고 일찌감치 월드컵 본선을 확정한 상황이었어요. 한국에서 예선 마지막 경기를 일본하고 했어요. 선발로 나갔는데 0-2로 졌죠. 감독님하고 언론에서는 나를 두고 뭐라고 하는 거야. 팀이 목표의식이 없는데 분위기가 제대로 잡히나.” 그의 마지막 A매치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사진=포항스틸러스 제공]

[사진=포항스틸러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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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이름으로

유공과 부천에서 10시즌을 소화한 김기동은 2003년 최순호 감독의 부름을 받아 포항으로 돌아온다. 2001년부터 최순호 감독의 러브콜을 받았지만 부천과의 의리 때문에 쉽게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고 했다.

“2002년에 부천에 트나즈 트르판(터키) 감독이 왔는데 나를 참 좋아했어요. 계약기간이 거의 마무리 단계였는데 구단에는 나를 꼭 잡아달라고 부탁했대요. 근데 부천에서는 마무리 단계라고 생각했나봐요. 1-2년만 더 뛰고 연수를 준비하라고 했어요. 나는 운동을 더 할 수 있는데 이건 아니다 싶어서 포항으로 옮기기로 마음먹었죠. 구두 계약만 하고 포항으로 넘어갔는데 부천에서 난리가 났어요. 거길 왜 가느냐고. 양쪽에서 줄다리기를 하다가 결국 포항하고 정식 계약을 했죠.”

포항으로 돌아 온 김기동은 지난해까지 9시즌을 소화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우승을 차지했던 2007년을 꼽았다. 무엇보다도 잊지 못할 대기록은 그의 가슴에 훈장처럼 남아있는 500경기 출전이다. 500경기 이상은 김병지(경남)에 이어 통산 두 번째지만 필드플레이어로는 김기동이 최초다.

“사실 500경기를 목표로 한 적은 없었어요. 원래 (신)태용이 형(현 성남 감독)이 가지고 있던 401경기만 깨자고 생각했지. 2007년에 402경기를 넘어서고 나니까 500경기라는 기록이 보이더라고요. 근데 더 중요한 목표는 우리 막내아들 준호 때문이었어요. 2007년에 준호가 6살이었는데 애들이 8-9살 정도는 돼야 아빠가 뭐를 했던 사람이구나 하는 기억이 생겨요. 아빠가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축구선수였다는 것을 준호가 기억할 수 있을 때까지만 축구를 하자고 생각했어요. 누구나 목표를 한 번에 100%까지 세우는 사람은 없다고 봐요. 큰 것도 있지만 중간에 작은 것을 하나씩 이뤄가면서 만족을 하고 또 다른 목표를 채우고 하는 거지. 아빠가 자랑스러운 축구선수라는 기억을 남겨주고 싶었어요. 작년부터 준호가 축구 조금만 더하면 안 되냐고 물어보더라고. 그만큼 친구들한테는 자랑거리였나 봐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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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직도 뛰고 싶다

연습생을 포함해 21시즌을 K리그와 함께 해 온 김기동은 통산 39골 40도움이라는 공격 포인트를 남겼다. 1골을 더 보태면 40-40을 달성할 수 있었지만 그런 수치상의 기록은 더 이상 그에게 의미가 없다고 했다. 오랜 선수생활 속에서 크게 스포트라이트는 받지 못했지만 김기동은 자신의 축구인생을 만족한다고 했다.

“아들한테 좋은 기억을 남겨 주고 싶었고 중요한 건 축구가 정말 좋았다는 거예요. 주목받거나 그런 것은 관심이 없었어. 사람마다 성격이 있겠지만 나는 조용하게 그냥 축구를 하는 자체가 좋았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일 하는 게 즐거우면 만족하는 거고. 축구화 신고 경기장에 나가는 게 마냥 좋았죠. 많은 연봉을 받는 스타보다는 그라운드에 나가는 게 목표였으니까. 힘들게 시작했잖아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게임을 뛰었고, 살아남는 것이 목표였죠.”

험난한 프로생활을 이어오며 그는 철저한 자기관리로 후배들의 귀감이 됐다. 팬들도 그런 김기동의 모습에 ‘철인’이라는 칭호를 보낸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올라 갈 곳도 없어 보이지만 아직도 선수 김기동에 대한 미련이 많아보였다.

“아직 특별한 부상도 없고 후배들이랑 팬들이 인정해 주니까 솔직히 은퇴라는 게 아쉽죠. 한편으로는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온 것 같아서 후회도 되고. 신혼여행가서도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여행하고 했어요(웃음). 프로라는 게 치열하잖아요. 방심하면 도태되고. 하루하루가 경쟁이야. 그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근데 그렇게 안 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야.”

현역 생활을 마감하는 김기동은 이제 지도자로 제2의 인생을 준비한다. 그는 후배들에 귀감이 되는 멘토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은퇴식이나 지도자 연수와 관련한 문제는 전적으로 구단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에 김기동은 “갑자기 생각났는데 중학교 때 운동 그만두고 공부 시작하면서 다시는 축구 안 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어요. 근데 남들 하는 거 보니까 다시 하고 싶더라고. 고민이 많거나 해도 운동할 때는 다 잊어버렸던 것 같아요.” 천생 그는 축구 '선수'였다.

[사진=포항스틸러스 제공]

[사진=포항스틸러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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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투데이 김흥순 기자 sport@
스포츠투데이 정재훈 사진기자 ro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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