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나무골편지]부처님 오신 날
[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부처님 오신 날이다. 어느 누구도 '성불하라'거나 '득도하라'는 식의 인사를 하지 않는다. 그래도 크리스마스에는 '강아지'부르는 듯한 인사법이 통용되기는 하는데... 이사온 16년째, 잣나무골에 감옥이 하나 둘 늘어간다.◇ 화난 백발氏
흐린 날씨가 잣나무골을 휘감고, 곧 비가 쏟아질 듯 하다. 아침 밭일을 시작하기 위해 마당으로 나선다. 앞집 아저씨가 고구마순을 심고 있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내 나이쯤 됐을거다. 하지만 머리는 백발이다. 스포츠형으로 짧게 자른게 인상적이다. 영화에서 본 듯한 가미가제 특공대가 연상된다.
백발氏는 언제나 화난 표정이다. 그는 내 집 바로 앞에 지난해 가을부터 집을 짓기 시작해 지금 막 마무리중이다. 그와 마주친 것은 수십번도 넘는다. 그때마다 그냥 눈 인사만 한다. 그도 내게 다가오려하지 않는다. '나야 당연히 이곳의 터줏대감이니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네겠지' 하며 기다린게 몇개월째다. '내가 잣나무골의 고참 아닌가 ? 의당 내게 먼저 아는 체를 해야.. .' 그래도 그는 인사를 하지 않는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텃새 한번 부려보지 못했는데 터줏대감 생활이 끝나려 한다.
'주말에 포크레인소리도 용인하고, 도로를 가로 막는 공사차량도 다 봐주고도 이러니... '
서운하기는 하다. 그러나 곧 포기했다.아직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한테 고참 전원생활자 행세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전원에서 사람들이 잘 어울릴 것이라는 건 옛말이다. 함께 지낼 이웃이 생긴다고 전혀 좋아할 수 없을 뿐더러 간혹 눈치를 살펴야할 처지다.
◇ 더 화난 벙커氏
'벙커氏'도 화가 나 있다. 잣나무골 맨 위쪽에 노출콘크리트 방식으로 지은 박스형 주택. 우리집에서 보면 단단한 벙커같다. 그는 지난해말 집을 완공했다. 그의 집에 방문해본 적은 없다. 그의 집 창문에 여러개의 포(包)가 거치돼 있고, 거실 한 복판에는 소총들이 즐비하게 진열돼 있을 것만 같다. 바위보다 더 단단해 왠만한 포탄에도 끄떡 없을 듯 하다. 육중한 회색집이 산 비탈 한가운데를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라니.'벙커氏'는 집을 지으며 주변의 나무들을 벌목해 벙커의 위용은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간혹 집 짓는 것을 지켜봤으나 '벙커씨'가 언제 어떻게 이사 왔는지, 그의 가족은 누구인지 모른다. 언젠가 마주친 적은 있다. 벙커氏는 당장 콧김을 뿜으며 들소처럼 달려들 것 같은 인상이다. 집하고 사람하고 어쩜 그리 닮았을까. '나보다 서너살 많으려나...'
그는 불만에 찬 목소리로 잣나무골에 사는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적의를 드러냈다. 당분간 화를 풀지 않겠다는 듯 결연했다.
"내가 살다살다 이렇게 이상한 사람들은 첨 봐. 가만 안 두겠어. 아니 도로 사용 승락서를 내줄 때 5천만원이나 줬는데 민원을 제기하다니.도무지 상식이 없는 사람들이야. 뭐 ! 이런 동네가 다 있어."
'이상한 사람들 ? 이런 동네 ?'
'땅주인에게나 화를 낼 것이지.우리가 무슨 잘못이라고 ?' 당초 그와 우리 사이에 어떤 평화협정이 있었던 건 아니라지만 다짜고짜 잣나무골 사람들에게 전쟁을 선포하고야 말았다. 다음에 그를 마주친다면 아주 불편할게 뻔하다.
전에 땅을 판 사람과 진입로 개설로 분쟁이 생긴 때문이란 건 이해가 간다. '벙커氏'는 일단 집을 짓고 나서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콧김 대신 거품을 쏘고 돌아갔다. 그의 건축을 방해한 일도 없고, 도로문제로 시비를 건 적도 없음에도 나는 '이상한 동네사람들' 중의 하나가 돼 버렸다. 어쨌든 그가 지난 겨울 전에 이사왔으나 아직 얼굴을 보지 못 했다. 그리고 전 땅 주인과 소송을 진행중이라는 걸 이웃을 통해 들은 적이 있다.
◇ 한번도 마주친 적 없는 입구氏
잣나무골 입구에도 재작년 집이 한채 지어졌다. '입구氏'네는 샌드위치 패널에 목재로 외장마감한 집이다. '입구氏'는 2년동안 전혀 마주친 적이 없다. 입구氏네는 내 아들보다 한살 많은 아들 하나가 있다. 그들은 학교를 오가며 만나는 것 같다. 그도 화 났는지는 모른다.
우리 동네 잣나무골에 화난 사람들이 많아서 나도 가까이 가지 않은 채 거의 인사도 안 나누고 산다. 입구氏의 은둔에 내가 별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인사를 하든 안 하든 내 생활이 달라질 것도 없고, 그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과의 인연이 그저 각박하다는 정도로 불편할 것도 없다. 잣나무골에서는 그저 부처님이나 돌아 앉으려나. 옆집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를 지경이니 단절되기는 잣나무골도 도시 아파트단지와 별반 차이가 없다. 잣나무골 사람들이 인사를 나눈다는 것은 개가 '成佛'한 것과 같으리라.
이제 잣나무골에는 집이 없다. 집 대신 감옥이 몇개 있다. 이웃 사이에도 높은 담장이 처졌다. 아마도 오늘날의 잣나무골이 예견해 인간의 緣을 그리도 번민하고, 고뇌했으리라.
◇ 어설픈 시커먼스氏
마침내 '시커먼스인 나', 부처님 오신날 백발氏에게 다가갔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고구마 심는게 참 가관였다. 밭 두둑 위에 고추 심듯 세워서 촘촘히 꽂아놓고 있었다. 고구마는 순은 가로로 길쭉하게 눕혀서 심어야한다. 그래야 마디에서 뿌리가 내리고 뿌리는 다시 커다란 고구마로 자란다. 그 모습을 바라보려니 답답해졌다. 그렇게 심었다가는 고구마 몇개 건지지도 못할 것이다. 도무지 이웃들에게 참견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간데 없고 발길은 슬금슬금 '백발氏'에게로 옮겨진다.
"텃밭이 아주 아담합니다. 농사는 지어보셨나요 ?"
그도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뚱한 표정이다. 왠지 뜨끔하다. 나의 접근이 어설프기는 하다. 잠시 긴장도 아니고, 배척도 아닌 표정이 교차한다.
"生초보입니다. 생각보다 농사가 어렵습니다. 이걸 다 지으려면 경운기라도 있어야하겠는걸요."
그가 대답한다. 다행이다.그의 텃밭은 200여평 가량 된다. 지난해 집 짓기전에 주말농장하듯이 부모, 친구들하고 가꾸던 것이 올해는 밭 모양이 제법 갖춰졌다. 그런 그에게 고구마 심는법을 일러줬더니 오후에 부모님이 오면 같이 해보겠다고 한다.
"그런데 철망으로 집 울타리를 하셨네요."
그는 얼마전 집을 짓고 철제담장을 둘렀다. 웅장한 2층 벽돌집이기는 하나 철제 담장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잣나무골 전체 분위기에서도 무척이나 생경스럽다.
'아무리 담장을 높게 올려봐라. 도둑 드는걸 막아지나. 수십층 아파트까지 침범하는 도둑이라면 담장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닐텐데...'
보기에도 흉하고, 돈만 들고, 전원에까지 나와서 담장까지 치려면 무엇하러 애써 이곳까지 왔을까. 차라리 도시에서 살지...그의 의도가 궁금했다.
"아 ! 글쎄. 건축업자가 담장을 안 치면 준공이 안 난다고 굳이 하래네요. 해놓고 알아보니 없어도 된다고 하잖아요. 나도 준공 나면 뜯어버리려고 철망으로 한 건데 건축업자에게 속은 생각을 하면 분합니다."
'그렇구나.화날만 하겠네. 그래도 이웃인 나하고는 인사라도 나누고 지내지. '
잣나무골에 오는 사람들마다 갈수록 적의가 번뜩이고, 화가 나 있고...
이사 왔던 시절이 그립다. 한동안 나는 윗집과 둘이서 살았다. 음식도 같이 해먹고 텃밭 일도 같이 하고, 여행도 하거나 서로 집을 봐주기도 했었던 때가 있었다.
이제 평화는 없다. 평화를 추구하겠다는 노력도 어렵다. 각자의 집들이 요새가 되고, 간혹 나눌 수 있는 것은 적의와 분노뿐이다.
<추신>
텃밭가에 심겨진 두릅나무 순을 자르지 않았다. 굳이 먹고 싶지도 않았다. 그대로 뒀더니 기어이 쇠기 직전이다. 이웃에 방문한 사람들이 잣나무골 구경삼아 산책하다 두릅을 발견하곤 딸까말까 망설인다. "따가도 괜찮다" 말하려다 그냥 둔다. 따가도 그냥 둘거고, 안 따가도 그냥 두겠다고 생각하며 한참동안 내일에 빠져 있었다. 그들도 천천히 걸음을 옮겨 변호사네 마당을 지나 산 모통이로 사라진다.
두릅나무 새순에서 하얀 피가 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두릅나무 새순이 푸르게 솟아올라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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