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경호 기자]"원자력발전소 건설이 무슨 공산품도 아닌데 왜 이렇게 끓는 냄비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아랍에미리트(UAE)에 사상 최초로 원전수출에 성공한 이후 최근 해외 각국의 잇따른 원전 러브콜 소식을 두고 원전 공기업 실무진사이에서 나도는 말이다. 이들은 "정부와 원전 관련 공기업, 민간기업들이 제 2 원전수주를 위해 적극 나서고 있으나 원전의 특수성을 무시한 성급한 판단과 조급한 기대는 자제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필리핀 남아공 말만 나오면 원전수출? =14일 지식경제부와 원전공기업들에 따르면 필리핀에서 한국형 원전을 건설하겠다는 의도와 달리 국내에서는 성사가능성을 매우 낮게 혹은 초기의 논의단계 수준으로 파악하고 있다.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은 지난 13일 외신들과의 기자회견에서 자국의 전력난 해소를 위해 한국형 원전 건설을 고려하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국내서도 이 소식이 재빠르게 확산되면서 필리핀이 원전수출 유망국으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정부 당국자는 "이 발언이 새로운 원전을 건설해 발주하겠다는 것인지, 기존 한국전력이 내놓은 공개매각 물건을 구입하겠다는 것인지 파악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에 앞서 지난 3월 아키노 대통령의 사촌인 마크 코주앙코 전 하원의원은 당시 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방한해 최경환 지경부 장관에게 대통령 친서를 전달한 바 있다. 이 친서에는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가 공개 매각하려는 기자재를 매입, 필리핀에 1000㎿급 한국형 원전(OPR-1000) 2기를 건설할 의향이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필리핀측은 사우디아라비아 자금을 이용해 현재 공개매각이 진행 중인 KEDO설비를 매입해 자국에 원전을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KEDO설비는 한전이 북한 신포 경수로 공사에 공급하려 했다가 사업중단으로 국내외에 보관해오던 기자재. 한전은 이를 모두 매각키로 방침을 정했으나 입찰자가 나서지 않아 유찰된 상태다. 매각 대상 물품은 원자로용기와 증기발생기ㆍ냉각재펌프 등 원자로 설비 관련 24종과 터빈날개ㆍ발전기회전자 등 터빈 발전기 관련 9종, 격납건물철판과 천장크레인 등 보조기기 8종 등 모두 41개 품목이다. 한전은 낙찰가를 총 1억1267만 달러(약 1300억원)로 정한 상태. 기자재는 현재 경남 창원과 미국, 일본 등지에 흩어져 보관 중이다. 북한 경수로는 1000MW급 2기로 영광원자력발전소 3호기~6호기인 한국 표준형으로 설계됐다. 하지만 1997년 설계된 구형 모델인 데다 필리핀 지형에 맞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원전수출후보국 대부분 재정취약한 개도국 한계도 분명=필리핀 말고도 최근에는 남아공 원전 열풍이 한차례 불었다. 지난 5월 서울에서 열린 한-남아공 비즈니스포럼에 참석한 양국 에너지부 장관이 원전 협력에 대한 콘센선스(합의)를 이루면서다. 그러나 남아공은 정부 재정이 취약한데다 월드컵 개최 등으로 막대한 재정부담을 안고 있어 원전 발주를 하더라도 경제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남아공은 전력공급 부족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2025년까지 현재의 발전용량 약 3만 8000MW를 두 배로 확충해 전체 전력생산의 25%를 차지한다는 구상이다. 2007년 초 에스콤社가 원자력발전소 건립을 추진했으나 2008년 재정난으로 사업을 중단했다. 남아공 정부는 월드컵이후 재정상황이 개선되면 즉각적으로 원전건설에 착수한다는 계획이다. 우리나라와는 이미 2008년 8월에 원자력연구원이 남아공 국영 남아공원자력연구개발공사(NECSA)와 원자력기술교류와 관련된 포괄적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가 별다른 진전이 없다. 전문가들은 남아공의 경우 천연자원과 원전건설을 패키지 형태로 협의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원전건설사업이 막대한 자금과 중장기 사업으로 리스크가 높은 점을 감안, 단독진출보다는 현지 업체나 다국적 메이저업체와의 전략적 제휴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전등 사업자간 협정에 이어 정부간 협정을 맺은 터키도 원전계약은 갈길이 멀다. 한-터키 양국은 내달말까지 터키 시놉원전과 관련된 연구를 거친 뒤 내년말까지 상업계약을 위한 세부협상을 벌일 예정이다. 터키 시놉원전 2기 사업비는 100억달러에서 200억달러 안팎이다. 터키는 아쿠유지역과 시놉지역에 각 각 4기와 2기의 원전을 지을 계획이지만 터키 정부와 발주처인 국영발전사 EUAS의 재정이 충분치 않아 국제경쟁입찰이 아닌 정부간 협약을 통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실상 수의계약자를 미리 선정해 자금조달, 부지제공, 설계, 공사비, 전력판매가격 등 모든 것을 협의해 결정하는 방식이다.
시놉원전은 프로젝트파이낸싱(PF: 건설 이후 수익을 담보로 자금을 빌리는 것)방식으로 진행된다. 발주국과 발주처의 신용이 탄탄해야 국제금융시장에서 건설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한전이 주 사업자가 될 경우 모든 건설자금을 조달하고 원전 운영을 통한 수익금으로 투자비를 회수해야 한다. 그러나 터키는 정부 재정이 취약하고 신용도도 낮다. 정부가 주사업자가 아닌 부사업자로 참여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도 막대한 부담을 덜기 위해서다.
▲UAE, 국내 원전건설도 빠듯..자금 인력 해결해야=한국형 원전 수출후보국가로 멕시코, 인도, 핀란드, 태국, 베트남 등이 줄줄이 거론되고 있다. 핀란드를 제외하고 대부분 개발도상국. 한국에 우호적이지만 모두 정부와 국영발주사의 재정이 취약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부 관계자는 "원전 수주가능성이 높은 국가는 대부분 재정이 취약한 개발도상국으로 원전건설자금을 발주처가 아닌 사업자가 제공하고 전력판매로 사업비를 회수한다. 원전사업자와 건설 등 컨소시엄의 자금조달능력이 중요하지만 현재로서는 국제금융시장에서 이를 조달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했다.
원전공기업 한 관계자도 "원전 1기당 평균 200명 정도의 신규인력이 필요한데 이들 교육에 1년 이상이 걸린다"면서 "UAE와 터키 원전 6기, 국내건설예정인 원전이 8기로 원전 추가수주를 대비하려면 국제 금융시장에서의 자금조달 능력은 물론 인력대책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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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호 기자 gung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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