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잣나무골편지]'GS루트'...길 위에서의 이름들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걸어서 이 세상 끝까지 가봤으면...거친 사막을 건너기도 하고, 끝없는 산맥을 넘어 대륙을 건넜으면 좋겠다. 바람이거나 구름이 돼서라도 그럴수만 있다면.....
어릴적 마을에 신작로가 생기고, 그 길로 사람들이 떠나갔다. 나의 형들도 뽀얀 먼지를 남기며 가뭇없이 멀어져 가는 버스에 실려 산 모퉁이를 지나 사라져 갔다. 난 일찍 깨달았다. 나도 언젠가 떠나야 한다는 것을...내가 살아갈 땅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을...

홀홀 떠나는 꿈 꾼다.
두번째 걷기는 성남 태평에서 영동대교, 청계천을 거쳐 충무로 신사옥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이뤄졌다. 27일 새벽 6시 첫 출근이 시작됐다. 태평에서 탄천으로 들어섰을 때는 지난번과는 달리 편안하고 포근했다. 영하 5도로 쌀쌀하기는 했지만 바람 한점 없어 추운 줄 몰랐다.탄천변의 별빛은 희미했다.

그래도 별은 별이다. 겨울녘 잣나무골의 별들은 서쪽에서 떠올라 북쪽으로 진다. 별들이 마지막 남은 빛을 다하여 마중나온 것이다. 천변에는 운동나온 사람이 없다. 오솔길을 걷는 기분이다. 6시50분경 복정앞 대왕교를 지날 무렵, 천변 뚝방 위 포장마차의 불빛이 강한 유혹을 보냈다.

올라가서 국수라도 한그릇 하고 가자. 이미 집 떠나기전 아침을 든든히 먹은 터라 더 먹기는 무리다. 하지만 불빛이 주는 유혹은 너무 강했다. "어떤 사람이 장사할까 ?" 궁금했다. 호기심은 참기 어렵다. 그런데 뚝방 오르는 길이 보이질 않았다. 이리저리 한참을 헤메고나서야 대왕교 건너편에 기어올라갈만한 곳을 발견했다. 마차 안으로 들어서자 메케한 연기가 가득했다. 불을 피운지 얼마 안 된 모양이다. 연기를 빼느라 천막 한편을 열어놔 춥기는 마찬가지다. 그토록 따스해 보이던 불빛은 온데간데 없다. 그저 그런 불빛일 뿐이다.
항상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숱하게 많은 것들에 현혹된다. 불빛도 그중의 하나다.마음속의 욕망도 마찬가지다. 부나방처럼 뛰어들어 자신을 불살라버리거나 욕망에 허무하게 무너지는 일이 많지 않던가.

불빛이 주던 따스함은 어느 구석에도 없다. 다만 솥에서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것이 위안을 줬다. 50대 중반의 부부는 고생한 이력이 물씬하다. 그들은 내게 "아직 준비가 안 됐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국수를 말아줄 수 있다"고 발길을 잡았다. 불빛의 유혹에 흔들린 내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을 알아채기라도 했나...머뭇대다 내친 김에 쉬어가기로 했다. 자리를 잡으려는데 개 한마리가 난로옆에 와서 똬리를 튼다. 황구다. 몸집은 크나 볼 폼은 없다. 국수가 삶아지는 동안 나는 배낭에서 캔커피를 꺼내 먹으며 개에게 말을 걸었다.

"너도 일하러 나온거니 ?"
그때 여자주인이 말했다.
"쟤 ! 별명 커피요"
뜬금없는 답변이다.
"별명 ? 그럼 진짜이름은요 ?"
"모르죠. 그냥 그렇게 불러요. 커피를 무진장 좋아하거든요."

난로에 장작을 밀어넣던 남자 주인이 발로 개를 가볍게 밀쳤다.
"이놈은 다리 건너 세곡동쪽에 사는데 여름부터 여기 와서 살아요."

황구는 지난 여름 이후 이곳에 와서 둥지를 틀었다. 그런 황구에게 인근 도로공사현장 인부들이 마시다만 커피를 주곤 했다. 황구는 커피를 즐겼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다. '커피'는 오후 무렵 집에 다녀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포장마차를 떠나지 않는다. '커피'는 하루에 예닐곱잔의 커피를 마신다. 인부들이 주기도 하고 주인이 주기도 한다. 그새 내 손에 쥐어진 커피가 바닥났다.

"좀 남겨줄 걸...쩝!!" 아쉬웠다.

"주인이 누군지 몰라요. 안 찾나봐요. 그래도 하루에 한번은 집에 다녀와요.이제 우리 식구 다 됐죠."

커피네 포장마차는 인근 공사현장의 간이 '함바'다. 국수가 다 끓여졌을 무렵 인부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난로가에서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들은 어수선하게 난로옆에서 서성이며 음식 주문도 하고, 커피한테 인사도 건넸다. 오랜 친구들이 나누는 아침 인사다. 개와 인부, 포차의 주인은 그렇게 아침을 만들었다. 들어올 때 한기를 쫓을 수 없었던 나는 조금 따스해졌다.국수가 맛 있었다. 배 부른데도 국물까지 다 비웠다.들어올 때와는 달리 기분도 좀 풀렸다. 그새 실내도 온기가 돌았다.

'커피'라는 별명은 오갈데 없는 황구에게 주인과 손님들이 "이곳에 살아도 좋다"는 허락인 셈이다. 그리고 친구가 돼서 살겠다는 소통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서 잠시 머물렀다 떠난다. 포장마차의 사람들이 내게 하등 이름을 불러줄리 없다.낯선 개에게마저 허락된 그 이름이 없으므로 나는 길을 다시 떠나야된다. 이름이 있는 곳까지.

길을 떠난다는 것은 언젠가 돌아오겠다는 것의 다른 말이다.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주인이 '언젠가 새벽에 국수를 먹고 간 손님'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주기를 기대한다. 

포차를 떠날 때는 7시30분. 동녘이 붉게 물들어왔다. 해가 막 솟으려는 찰나다. 더이상 지체할 수가 없다. 속도를 내려는데 후배 준호한테 전화가 왔다. 늦잠을 자서 동행이 어렵다고 했다. 왠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우리는 탄천과 양재천이 합쳐지는 지점에서 만나기로 돼 있었다. 추운데 그를 데리고 한강을 건너는게 안쓰럽던 차였다. 누군가 동행한다는 거 때로 무거운 일이다. 수서를 지나면서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이 늘었다. 마라톤 동호회들이 종종 나타났다. 무리지어 달리는게 보기 좋았다. 그들은 나와 다르다. 나는 동행이 없어 홀가분한데 아예 무리를 지어 함께 가고 있는 것이라니...나와 다른 이들이 잠시 공존했던 순간이다.어떻게 다른 지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광평교 아래부터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주변에 어디를 둘러봐도 화장실은 없고 산책하거나 운동하는 사람들이 있어 노상방뇨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언제나 난관은 있는 법이다. 날이 밝아지면서 탄천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 여행길은 밤중여서 주변을 잘 살필 수 없었다. 강폭이 족히 300m는 넘을 것 같다. 긴 탄천은 아주 너른 갈대밭을 형성하고 있어 도심의 젖줄이 되기에 충분해 보였다.

다만 그냥 갈대밭으로만 방치된게 아쉽다. 지금이라도 경관과 자연환경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휴식과 스포츠, 부분적인 위락 기능을 부여해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민과 행정가,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봄직하다. 한강에 이르러 화장실에 들렀다. 9시경..해가 많이 솟아올랐다. 집에서 쉬고 있다면 늦잠을 즐길 시간이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잠시 쉬었다.

그리고 서울숲에서 11시경에 만나기로 했던 후배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속도라면 서울숲까지는 한시간 정도. 서둘러 오거나 바로 회사로 출근하라고 일렀다. 영동대교에는 자전거도로가 강변 보행로와 연결돼 있다. 나는 이런 길이 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사실 한강 위의 다리를 걸어서 건너기도 처음이다. 당초 성수대교와 영동대교 중 어느 길을 넘어서 서울숲으로 갈 것인가 걱정이 많았다. 다리를 건너는 동안 현기증이 났다. 강물이 푸르게 멍들어 있다. 좌우로 넓게 펼쳐진 한강과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들어왔다. 황지우의 싯귀가 생각났다. 교각에 그려진 눈금이 짬뽕문명의 수명을 재는 것 같다던 그 싯귀가 생각나는 연유는 잘 모르겠다. 다리를 건너면서 다리가 무거워졌다. 포장마차를 나온 이후로 쉰 적이 없다.

다리 위에서 괜시리 기분을 낼 겸 물을 하나 꺼내 먹었다. 그러면 좀 무게가 줄어들려나... 다리 북쪽에 강변으로 진입하는 계단이 또 있다. 처음 건너는 다리, 강변과 연결된 자전거도로며 계단. 나는 무지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이 길을 통해서 걸어다니면 되겠다는 생각이 미치자 나는 놀라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기뻤다. 그래서 이름을 지었다. 'GS 루트'라고... 탄천을 거슬러와서 청계천을 향하는 길목이자 중간점인 영동대교길을 나는 그렇게 명명하기로 했다.

예전 중부고속도로 하산곡일대의 소나무 세그루에 '이규성 소나무'라 이름 지어놓고 출퇴근할 때마다 바라다봤던 기억이 있다. 이규성 소나무는 지금도 고속도로변을 늠름하게 지키고 있다. 또 버릇이 도진 것이다. 무엇이건 이름 짓고 싶어하는 습성은 버릴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다.포차의 나그네인 황구가 '커피'가 된 것처럼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줬을 때 비로소 존재가 되는...나 또한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관계와 존재를 확인하고자하는 그런 것 때문에 생긴 버릇 (?).

'GS루트 ? 이규성 길!!'... 나의 길이다. 푸하하하 ! 만세 !
"너는 이제 나와 함께 살아도 된다"고 내가 먼저 영동대교를 허락했다.

강변 북쪽 보행로는 남쪽과 달리 이정표가 잘 돼 있다. 여의도에서 탄천으로 성남 태평까지 걸었던 첫번째길과는 달리 거리 표시가 많아 내 위치를 확인하기가 용이하다. 9시50분경 성수대교 북단 서울숲 인근을 지나려는데 부서 후배한테 전화가 왔다. 열한시로 출근 시간이 당겨져 비상연락중이란다. 나는 부서원들의 출근 가능시간, 여건 등을 점검토록 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청계천 을지로 3가까지는 12km 정도. 아마도 걸으면 두시간이고 뛰면 제시간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거리다.

그 시간 도봉에서 중랑천을 따라 걸어오고 있던 후배 소민호에게 청계천 입구까지 뛰라고 지시했다. 당초 후배는 나보다 두시간 늦게 중랑천을 따라 걷다가 11시경에 청계천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던 터였다. 열시십분경 입구에서 만난 우리는 잠시 갈등했다. 아무리 빨라도 제 시간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그럼 여기서 차를 타고 시간을 맞출 것인가. 그대로 진행할 것인가..결론은 일단 달리기로 했다.

청계천변을 걷는 것은 한강변을 걷는 것과 사뭇 다르다. 아주 비좁고, 빌딩이 양옆을 내리 누르는 듯 했다. 우리는 뛰다가 걷기를 반복했다. 동대문에 이르러서는 물집 잡힌 발가락이 쓰리고, 다리도 아팠다. 어깨마저 뻐근했다. 예기치 않던 일로 무리를 한 탓인가. 똑바로 걸어지지 않았다. 동대문과 평화시장, 을지로 일대를 덮고 있는 빌딩 숲을 지나 태평을 떠나온 지 5시간 반만에 충무로 사옥에 닿았다.

걷는 자들의 숙명은 무엇일까 ? 나는 얼마나 숙명에 순응하고 있는 걸까 ? 아직 걸어야할 날들이 많이 남아 있다. 끝내 사막과 산맥을 넘어 대륙을 건널 수 있을 지는 모른다. 그 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존재들에게 나는 또 이름을 부여한다.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어른들 싸움에도 대박 터진 뉴진스…신곡 '버블검' 500만뷰 돌파 하이브-민희진 갈등에도…'컴백' 뉴진스 새 앨범 재킷 공개 6년 만에 솔로 데뷔…(여자)아이들 우기, 앨범 선주문 50만장

    #국내이슈

  • 공습에 숨진 엄마 배에서 나온 기적의 아기…결국 숨졌다 때리고 던지고 휘두르고…난민 12명 뉴욕 한복판서 집단 난투극 美대학 ‘친팔 시위’ 격화…네타냐후 “반유대주의 폭동”

    #해외이슈

  • 고개 숙인 황선홍의 작심발언 "지금의 시스템이면 격차 더 벌어질 것" [포토] '벌써 여름?' [포토] 정교한 3D 프린팅의 세계

    #포토PICK

  • 1억 넘는 日도요타와 함께 등장한 김정은…"대북 제재 우회" 지적 신형 GV70 내달 출시…부분변경 디자인 공개 제네시스, 中서 '고성능 G80 EV 콘셉트카' 세계 최초 공개

    #CAR라이프

  • [뉴스속 인물]하이브에 반기 든 '뉴진스의 엄마' 민희진 [뉴스속 용어]뉴스페이스 신호탄, '초소형 군집위성' [뉴스속 용어]日 정치인 '야스쿠니신사' 집단 참배…한·중 항의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