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경매장의 베이지색 조끼가 불러낸 '다른 바다'
지난 주말, 런던의 한 경매장에 베이지색 구명조끼 하나가 나왔다. 캔버스 천에 코르크를 채운 주머니 12개가 달렸고, 어깨를 받치는 부분과 옆으로 묶는 끈이 있었다. 타이타닉 일등석 승객 로라 메이블 프랑카텔리가 입었던 조끼였다. 경매사는 "한 세대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물건"이라고 했고, 실제로 이 조끼는 예상가 25만~35만파운드를 훌쩍 넘어 67만파운드(약 13억 4000만원)에 팔렸다. 타이타닉 생존자의 구명조끼가 경매에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로라 프랑카텔리는 패션 디자이너 루시 더프 고든의 비서였다. 고용주 부부와 함께 구명정 1호를 타고 살아남았다. 그 구명정은 정원 40명인데 12명만 태운 채 내려갔다. 타이타닉은 1912년 4월 첫 항해에 나섰다가 빙산과 부딪혀 가라앉았고, 승선 인원 약 2200명 가운데 약 700명만 살아남았다. 그 조끼에는 같은 구명정에서 구조된 생존자들의 서명이 남아 있었다. 사람 하나를 물 밖으로 데려온 뒤, 다른 사람들의 이름까지 품은 물건이다.
사람들은 낡은 천조각에 돈을 내는 것이 아니다. 그 천이 지나온 밤에 돈을 낸다. 누구 몸에 붙어 있었는지, 어느 바다를 건넜는지, 물 밑으로 가지 않고 어떻게 돌아왔는지. 그래서 침몰선의 시계나 편지, 조끼에는 세월이 흐르면 가격표가 붙는다. 몸은 사라져도 물건은 남는다. 남은 물건은 설명문을 얻고, 유리 진열장을 얻고, 경매장을 얻는다.
그런데 구명조끼는 다른 유물보다 이름이 세다. '구명(救命)'. 이름이 먼저 약속을 해버린다. 살리겠다고, 띄우겠다고, 마지막 순간에 몸 하나쯤은 붙들어 주겠다고. 그래서 이 물건은 값이 붙는 순간에도 단순한 수집품이 되지 못한다. 사람을 살린 조끼는 낡을수록 더 선명해진다. 그 낡음이 곧 살아 돌아온 시간의 길이이기 때문이다.
타이타닉 경매 기사를 읽다 보면 이상한 대목이 하나 있다. 생존자들의 서명이다. 조끼 위에 남은 것은 바닷물이 아니라 이름이었다. 어떤 밤은 물건을 적신 뒤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살아 나온 사람들의 필체를 남긴다. 그래서 이 조끼는 침몰선의 잔해라기보다 구조된 사람들의 공동 서명문처럼 보인다. 그 배가 가라앉은 뒤에도 누군가는 이름을 적을 수 있었고, 그 이름들이 114년 뒤 경매장까지 따라온 것이다.
한국 사람에게 구명조끼는 그래서 먼 물건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수습된 희생자 269명 가운데 235명이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팽목항 유류품보관소에서 확인된 세월호 구명조끼에는 '1994년 5월'이라는 제조연월과 일본 제품 표기가 남아 있었다. 세월호가 일본에서 건조된 해와 같은 연도다. 당시에는 이 20년 된 구명조끼가 실제로 제 기능을 했는지 의문이라는 보도도 이어졌다.
타이타닉의 조끼에는 생존자의 서명이 남았다. 세월호의 조끼에는 제조연월이 남았다. 한쪽은 사람을 살린 뒤 유물이 됐고, 다른 한쪽은 사람을 살리지 못한 채 증거로 남았다. 똑같이 물에 뜨라고 만든 물건인데, 어떤 조끼는 경매장으로 가고 어떤 조끼는 질문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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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경매장의 베이지색 조끼 사진을 보고 있으면 114년 전 북대서양보다 먼저 다른 바다가 떠오른다. 사람을 살린 조끼는 오래 지나 값이 붙는다. 사람을 살리지 못한 조끼는 오래 지나도 값이 붙지 않는다. 대신 날짜가 붙는다. 어떤 조끼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름을 얻고, 어떤 조끼는 끝내 제조연월만 남긴다. 두 바다를 가른 것은 파도의 높이가 아니라 마지막 순간의 구조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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