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Stage]결국 널부러진 칼만 살아남는 '칼로막베스'
극이 시작되면 배우는 보이지 않고 칼통만 무대 중앙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어디선가 영화 '황야의 무법자'를 노래하는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이어 배경의 철제 구조물 중앙 문이 열리며 사람 무리가 등장한다. 칼을 쥐고 싶어하는 자들이다. 칼통에서 칼을 하나씩 뽑아 들고, 양쪽으로 갈라서 서로를 노려본다. 긴장감이 고조되면서 배경의 철제 구조물은 UFC 옥타곤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 '글래디에이터' 속 검투사들의 투쟁 장면도 연상된다. 마침 연극이 마련된 국립극장 하늘극장은 객석이 무대를 원형으로 둘러싼 아레나형이다.
중앙에서 노승 한 명이 어리둥절한 관객에게 상황을 설명하는데, 장황하게 이어지자 무리 중 한 명이 일갈한다. "대충하고 칼질해!." 곧 두 무리의 목숨을 건 싸움이 시작된다. 일대 혼란이 이어지던 중 양측의 우두머리가 일합을 겨룬다. 우두머리 간 대결에서 승자가 바로 이 극의 주인공 '막베스'다.
연극 '칼로막베스'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를 비튼 작품이다. 맥베스는 스코틀랜드 글라미스의 영주 맥베스가 자신을 신임하던 덩컨 왕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뒤 죄책감에 시달리다 결국 비극적 최후를 맞는 이야기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세계에서 연극으로 가장 많이 공연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어느 극장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상연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기가 많다. 하지만 너무 많이 알려진 이야기와 셰익스피어 특유의 장황한 수사에 지루함을 느끼는 관객도 더러 있다.
칼로막베스의 고선웅 연출은 원작의 장황함을 과감하게 걷어낸다. 고선웅 연출 특유의 짧고 축약적인 언어유희로 끊임없이 웃음을 유발하면서도 권력 투쟁의 잔혹함과 허무함을 직관적으로 부각한다. 글래디에이터 속 검투사들을 연상시키는듯한 설정은 이같은 의도를 드러내는 효율적인 도구가 된다.
극은 죄수들이 넘쳐나는 먼 미래, 죄수들이 모여 사는 가상의 공간 '세렝게티 베이'를 배경으로 한다. 수용 시설은 부족하고 더 이상 세금을 축낼 수 없어 죄수들이 투쟁을 통해 자연 도태되도록 설정한 공간이다. 죄수들은 그 곳에서 영토를 나누고 서열을 정해 권력 다툼을 벌인다. 제목 칼로막베스는 '칼로 막 베었어'라는 의미로 권력을 위해 죽고 죽이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나타낸다. 세렝게티라는 명칭은 인간을 짐승처럼 만든 권력 투쟁의 세계를 상징한다. 때로 동물과 다름없는 권력 다툼을 벌이는 인간 사회에 대한 냉소의 의미를 담은 셈이다.
원작에서 맥베스는 전쟁에서 승리한 뒤 장차 스코틀랜드 왕이 될 것이라는 마녀의 예언을 듣고 권력욕에 사로잡힌다. 칼로막베스에서는 마녀 대신 맹인술사가 막베스의 운명을 예언한다. 권력에 눈먼 인간에 대한 조소로 읽힌다. 막베스의 친구 방커(원작의 뱅코)는 "앞 못 보는 늙은 노파가 앞을 보았구나"라고 중얼거린다.
칼로막베스는 맥베스의 서사를 충실히 따라, 왕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막베스의 처참한 최후로 결말을 맞는다. 막베스를 피해 도망갔던 당컨(던컨) 왕의 아들 말콤(맬컴)은 다시 스코틀랜드 왕위를 되찾는다. 원작은 여기에서 이야기가 끝난다.
하지만 칼로막베스에서는 마지막에 한 인물이 더 등장한다. 방커의 아들 플리언스다. 원작에서 마녀는 뱅코(방커)의 후손들이 스코틀랜드의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지만 정작 플리언스의 행적은 후반에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칼로막베스에서는 막판 플리언스가 객석에서 깜짝 등장한다. 플리언스가 강력한 무기로 왕위를 되찾은 뒤 기뻐하는 말콤 일당을 몰살하면서 극은 막을 내린다. 극의 시작 때처럼 무대 위 배우는 사라지고, 칼만 남는 셈이다. 다만 처음 시작 때 한 통에 모여있던 칼들이 사방으로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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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막베스는 지난해까지 서울시극단 단장을 지낸 고선웅 연출이 만든 극단 마방진의 창단 20주년을 기념해 16년 만에 선보이는 작품이다. 2010년 초연 당시 동아연극상 작품상, 연출상을 받았다. 오는 15일까지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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