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김혜연의 AHA]예술의 시작은 우연한 발견과 경험
(19)금배섭 안무가
예술은 인간 경험과 우연적 발견서 출발
AI가 대체 못하는 몸의 감각, 무용의 중심
일상 사물, 무대서 새로운 의미로 전환
신작 '누수', 틈·사이에서 흘러나온 사건탐구
성과보다 버티는 힘, 휘발되지 않는 길 걸어야
금배섭 안무가는 2009년 현대무용 단체 춤판야무를 창단해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연극과 전통 예술을 공부한 뒤 무용으로 전향했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과 일상적 사물을 통해 감각적인 무대 언어를 구축하는 데 강점을 지닌다. 특히 솔로 연작 <미친놈 널뛰기>(2014), <섬>(2017), <니가 사람이냐?>(2017), <포옹>(2018) 등의 작품은 '홀로 버티며 사라지는 사람들'을 주제로 개인의 실존과 사회적 타자에 대한 탐구를 담고 있다. <오>라는 연작 솔로 전시에서는 이 다섯 작품을 모아 공연하였고, 작품 <사이>와 올해 신작으로 발표한 <누수(2025)>도 호응 속에 공연을 마무리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금배섭은 안무자이자 예술감독으로서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자신만의 안무법을 통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Q. 우선 독자분들께 본인 소개와 함께, '춤판야무'라는 단체에 대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A.저는 현대무용을 하고 있는 안무가 금배섭입니다. 2009년에 '춤판야무'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을 시작했어요. 초창기에는 제가 마당놀이, 탈춤, 판소리 같은 전통 예술을 배우면서 얻은 경험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때는 전통을 어떻게 새롭게 재창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현재의 언어로 바꿔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작품을 만들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관심사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단순히 전통을 소재로 삼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지 않으면 발생하지 않는 어떤 것, 그러나 만나면 반드시 생겨나는 어떤 것"에 주목하게 된 겁니다. 그 접촉과 관계의 순간에서 생겨나는 긴장과 에너지가 저에게는 늘 중요한 화두였어요. 지금은 관객이 무대를 단순히 '보는' 차원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자기 감각이 열리고 무언가를 새롭게 '만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Q.원래 연극을 공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용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A.맞습니다. 처음에는 연극을 하고 싶었어요. 연기도 배우고 무대에도 서봤습니다. 그런데 연극에서는 여전히 언어와 서사가 중심이 되잖아요. 그러다 어느 날 무용 공연을 보게 되었는데, "몸만으로도 세계를 설명할 수 있구나", "세상에 저런 게 있구나."라는 충격을 받았어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사를 따라가지 않아도, 몸 자체가 그 순간의 언어가 되는 경험이 제겐 굉장히 강렬했어요.
그래서 무용과 입시를 다시 준비했고, 결국 그 길을 선택하게 됐습니다. 지금 제 작업에는 여전히 연극적 요소나 '의례적' 분위기가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제 작업을 어떤 '제의(祭儀)'에 가깝다고 생각하면서 접근하지는 않지만 어떤 작품에서는 그러한 의식을 넣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그러한 의식을 담고 있는 '씻김'과 같은 소재를 통해 풀어내기도 해요. 인간과 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하려 했던 것 같아요. 무용은 저에게 단순히 동작이나 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관계, 거리 등의 세계를 잇는 다리 같은 것이라 생각해요. 그런 사이에 있는 것들에 재미를 느껴요.
Q.안무가님의 작품 아이디어는 주로 어디서 출발하나요? 이번 신작 <누수>는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A. 무엇을 이야기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 질문하면서, 그동안 보고 느껴왔던 경험들이 하나둘 떠오르죠.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길을 걷다가 떠오르기도 하고, 다른 예술 작품을 보면서 영감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게 초안 같은 것이 먼저 잡히고, 그 안에서 점점 작품의 뼈대가 세워집니다.
<누수>의 경우도 처음부터 이 제목이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원래는 전혀 다른 제목을 생각했는데, 드라마터그가 "누수라는 단어는 어떠냐" 하고 제안했어요.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흥미롭더군요. '누수란 무엇일까? 무엇이 새어나가는 걸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진화, 퇴화, 상실' 같은 개념들까지 이어졌어요. 결국 어떤 것이 스며들어 흘러나가는 과정, 비어 있는 공간 속에서 생겨나는 사건들을 탐구하는 작업이 되었죠.
저는 늘 작품이 끝나고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아, 그게 이런 의미였구나' 하고 깨닫는 경우가 많아요. <포옹>이라는 작품도 그랬습니다. 세월호 사건과 잠수사의 죽음에서 출발했지만, 작품 속에는 직접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제 안에서 어떤 이슈로 남아 무대를 통해 다른 방식으로 흘러나왔던 겁니다. <누수> 역시 지금은 단어 하나에서 출발해 여러 층위의 질문을 만들어가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해석으로 다가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제 작업은 언제나 '비어 있음'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 같아요. 들어오고 나가고,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공간에서 무엇이 발생하는가. 그것이 틈일 수도 있고, 사이일 수도 있죠. <누수>라는 단어는 그 과정의 본질을 잘 드러내는 장치였습니다. 무언가가 흘러나가는 동시에 남는 것, 그 모순적인 상황을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것, 그것이 이번 작품에서의 물음이었어요.
Q.봉지, 와이셔츠, 유리테이프 등 일상적인 물건들을 무대에 자주 등장시키십니다. 이러한 사물들을 택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A.저는 무대 세트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들에는 별 흥미가 없고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이미 정해진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상상을 불러일으키지 않거나 다른 감각이 일어나지 않아요. 반면에 비닐봉지, 와이셔츠, 젓가락, 종이 같은 일상의 사물들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우리가 늘 곁에 두고 쓰지만, 무대 위에 놓이면 전혀 다른 의미와 감각을 만들어내죠.
예를 들어, 비닐봉투를 선풍기로 날린다면 단순한 효과일 뿐이지만, 사람이 부채로 힘겹게 바람을 일으키면 우연적이고 불완전한 움직임이 만들어집니다. 그 불확실함이 바로 무대의 긴장을 살려줍니다. 저는 이런 사물들을 통해 관객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새로운 감각을 경험하게 하고 싶어요. 이미 존재하는 것을 다시 보는 순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도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니까요.
Q.안무가님께서는 사물의 본래 목적을 해체해 새로운 의미를 '발명'하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그 안에 잠재된 의미를 '발견'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본인은 어떤 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시나요?
A.사실 두 가지가 다 맞습니다. 저는 늘 무대에서 '삽질'을 해요. 여러 사물을 만지작거리며 이게 어떤 성질을 가졌는지 탐색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빛나는 순간이 찾아오면 '아, 이거구나' 하고 붙잡게 되는 거죠. 그건 '발견'에 가깝습니다. 동시에 그것을 작품의 구조나 안무와 연결해 관객에게 새로운 의미를 전달하는 건 '발명'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아주 크고 긴 종이를 양쪽에서 사람이 팽팽하게 잡고 서 있어요. 그런데 중간쯤 위치에 선으로 물방울을 떨어뜨렸을 때 종이에 스며든 물과 잡아당기는 힘이 같이 작용하면서 이내 종이가 끊어지게 되죠. 그 순간을 떠올려 보세요. 그것은 제가 억지로 만든 게 아니라 종이가 가진 성질이 스스로 드러난 겁니다. 이 외에도 유리테이프는 무엇인가를 붙이는 용도로 사용되죠. 하지만 그 테이프 하나에도 끈적이는 성질, 빛이 투과되며 반짝이는 것, 어떤 사물의 움직임을 잡아서 닫아주는 등 다양한 사용과 쓰임이 있어요. 이러한 것을 무대 위에서 관계와 맥락 속에 놓을 때, 비로소 저의 작품에서는 언어가 됩니다. 저는 이런 '발견과 발명 사이의 접점'에서 펼쳐지는 움직임과 감각, 상상이 즐겁고 그것들을 작품 속에서 잘 녹여내고자 합니다. 때론 흥미로운 것들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 버려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것들을 찾아내고자 연습실에서 무용수들과 리서치를 하고 고민을 해나가며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어요.
Q.이런 발견들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A.단순히 말하면 재미입니다. 연습실에서 며칠이고 시도하다가 계속 안 되던 것이, 어느 순간 불현듯 '된다' 싶을 때 오는 쾌감이 크거든요. 그때는 머리와 몸이 동시에 반짝하면서, 이 작업을 계속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저는 자주 산이나 동네 산책길을 뛰거나 걸으며 생각을 정리합니다. 달리다 보면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라 속도가 빨라지기도 하고, 고민에 빠질 때면 느리게 걷게 되기도 해요. 움직임 속에서 생각이 열리고, 생각 속에서 다시 몸이 움직이는 겁니다. 그 리듬이 저를 계속 작업과 연결시켜 주는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사실 많은 영감은 그렇게 걸음에서 찾아져요. 특별한 계기나 이유보다는 그렇게 한참을 걷고 고민하다 발견되는 감각, 아이디어들을 만날 때 오는 재미가 바로 작업을 지속하는 원동력이라 생각해요.
Q.요즘은 AI가 예술을 대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도 많습니다. 안무가님께서는 AI와 예술의 관계를 어떻게 보시나요?
A.저는 AI에 깊이 빠져본 적은 없지만, 호기심은 있습니다. 챗GPT를 사용해본 적도 있고, 로봇에 관한 뉴스를 접하며 '앞으로 어떻게 될까'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마치 사람처럼 대화를 이어가는 경험은 꽤 신기했어요. 저는 처음 체험판을 사용했는데 무료 제공되는 것에서 종료되니 괜시리 인사를 하고 헤어지게 되는 경험을 했어요. 마치 사람을 대하듯 말이죠. 고맙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서도 대화 이전에 예술에서 중요한 건 '영감'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예술은 결국 개인적 경험과 우연적 발견에서 출발하는데, 지금의 AI는 그 경험을 직접 갖지 못할 테니까요. 사물은 우리에게 영감을 줄 수 있지만 스스로 영감을 받지 못하듯이요. 언젠가 AI가 창작을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예술은 단순히 결과물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의 감각과 발견에 대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지금은 인간만이 그 우연적 발견을 발명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몸, 인간의 경험이 여전히 예술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Q.앞으로의 작업에서 로봇이나 AI가 무용수로 등장할 가능성은 있을까요?
A.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상상해본 적은 없습니다. 로봇과 인간이 횡단보도에서 만난다면 내가 누구 편에 설까, 그런 일상의 상상을 해본 적은 있지만 무대에 로봇을 올린다는 건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거든요. 다만 예술은 늘 '처음 보는 존재'와의 만남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왔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로봇이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무용수와 관계 맺는 장면을 만들어볼 수도 있겠죠.
저에게 중요한 건 언제나 '사이'입니다. 사람과 사물, 몸과 공간, 인간과 기계 사이에서 생겨나는 긴장과 틈. 그것을 발견하고 관객과 나누는 것이 제 작업의 핵심이에요. 빠르게 변하는 AI 시대에도 이 태도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 결국 중요한 건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만 발생하는 것"이니까요. 아마도 그것이 제가 춤을 통해 끝내 붙잡고 싶은 본질이고, 앞으로도 계속 던질 질문일 것입니다.
Q.오랜 시간 창작을 이어오시면서, 후배 무용수나 젊은 예술가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앞으로의 소양'은 무엇일까요?
A.요즘은 모두가 바쁘고, 또 빠르게 결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가잖아요. 하지만 무용은 그렇게 성급하게 처리한다고 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는 분야가 아닌 것 같습니다. 급히, 빨리, 많이 하려는 태도보다, 하나하나 발자국을 꾹꾹 눌러가며 여유롭게 밟아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야 자기 작업에 깊이 들어갈 수 있고, 오래도록 춤을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젊을 때는 힘이 넘치니까 무작정 밀어붙이기도 하죠. 그런데 그렇게 막하다가 지쳐서 어느 순간 무대를 떠나버리는 친구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제 또래가 되고 나면, 안타깝게도 활동을 멈춘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분명히 좋은 예술가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사라지고, 소진되어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저는 후배들에게만큼은 그렇게 '휘발되지 않는 길'을 걸었으면 합니다. 예술가로서의 삶은 길고, 꾸준히 버티는 힘이 필요하니까요. 저는 평생 무용을 하고 싶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연습실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행복일 거예요. 안무와 출연을 병행하며 동료들과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순간은 제게 늘 소중합니다. 앞으로도 새로운 작품을 만들 때마다 '이게 좋은 작품인가, 경험과 연륜이 돋보이려면 무엇을 더 고민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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