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일본은행 산증인 '잃어버린 30년'을 돌아보다
시라카와 前총재 회고록…금융위기·중도 낙마 '불운'
'BOJ 통화량 부족=디플레이션 원인' 정치권 지적 반박
"명목 임금이 오르지 않은 것이 최대 원인" 주장
"나는 일본 경제에 대한 전망을 하향 조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총재대행이 된 지 불과 2주 만에 열린 첫 통화정책회의에서 이런 견해를 채택하는 것이 꺼려졌다. 첫 회의에서 하향 조정을 강행할 경우 정책위원회 구성원 간 동료애가 약해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라카와 마사아키 전 일본은행(BOJ) 총재가 자신이 처음 주재한 통화정책회의를 회고하며 ‘일본의 30년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서 쓴 내용이다. 통화정책회의 날짜는 2008년 4월9일.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투자은행 베어스턴스가 JP모건 체이스에 인수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때였다. 베어스턴스는 같은 해 3월16일 JP모건에 인수됐다.
시라카와 전 총재는 베어스턴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5일 뒤인 3월21일 BOJ 부총재 겸 총재 대행에 임명됐고 다시 3주 뒤에는 총재가 됐다. 자신이 주재한 첫 통화정책회의에서 주저하는 모습은 미국 금융 시장에 이미 한 차례 큰 풍파가 지나갔음에도 여전히 경기에 대한 판단이 안이한 것 아니었나 하는 느낌을 준다.
당시 세계 금융 시장에서 어느 누구도 베어스턴스 이후 닥칠 태풍을 예상하지 못했다. 마사아키 전 총재는 4월11일 주요 7개국(G7) 회의 후 정책 당국자들과 은행 임원들 간 회의에서 "최악의 상황은 지났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썼다. 당시 금융 시장 지수도 흥청망청이었다. 뉴욕 증시는 5월까지 사상최고치 행진을 했고 뉴욕 유가 선물은 그해 7월에 배럴당 150달러에 육박했다. 당시 기록한 유가 사상최고치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5개월 여가 지난 9월15일 월요일 베어스턴스보다 더 큰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파산보호 신청 3일 전인 9월12일 오전 G7 재무장관들과 중앙은행 총재들 간 원격회의가 열렸다. 당시 회의에서 헨리 폴슨 미국 재무장관은 리먼의 인수자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보고했다. 마사아키 전 총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 동안 미국 동료들이 결코 리먼의 청산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한다.
리먼은 예상과 달리 파산했고 이후 세계 금융 시장은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뉴욕 유가는 그해 말 배럴당 10달러 선까지 떨어졌다.
시라카와 전 총재는 BOJ에서 40년 넘게 일한 BOJ의 산증인이다. 일본이 고도성장기를 구가하던 1972년 BOJ에 입행했고 2013년 3월 총재 자리에서 물러났다.
시라카와 전 총재의 BOJ에서의 경력 후반기 20년은 일본의 잃어버린 시대와 겹친다. 일본 부동산 거품은 1990년대 초 붕괴했다.
시라카와는 불운한 총재였다. 취임하자마자 세계 금융위기가 터졌고 2011년에는 동일본 대지진도 수습해야 했다. 퇴임할 때도 임기를 다 채우지 못 하고 중도 낙마했다. 2012년 12월 5년여 만에 다시 총리로 복귀한 아베 신조는 20년 넘게 이어지는 디플레이션을 타개하기 위해 BOJ의 윤전기를 돌려 무제한으로 돈을 찍어내겠다고 공언했다. BOJ의 독립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시라카와 총재는 용납하기 어려웠다. 결국 이듬해 3월 총재 직을 내려놓고 40년 넘게 근무한 BOJ를 떠났다.
시라카와 전 총재는 23개 장으로 이뤄진 이 책에서 한 장을 할애해 디플레이션 논쟁을 다룬다. 디플레이션에 대해 정치권이 생각하는 개념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며 디플레이션이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실패 때문이라는 견해에 반대 주장을 펼친다. BOJ의 통화 완화 정책 의지가 부족해 통화량 부족이 디플레이션의 원인이라는 지적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라카와는 디플레이션이 일본 저성장의 원인이라는 판단도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2010년부터 고령화와 출산율 저하, 일본 산업의 생산성과 경쟁력 하락 문제에 대해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고 강조한다. 또 일본 디플레이션의 가장 큰 원인은 명목 임금이 많이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일본에서는 경제가 침체되는 동안 고용주들은 최대한 일자리를 유지하고,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지키는 대신 낮은 임금 상승을 수용하는 기업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은 경기 침체기에도 실업률이 오르지 않는 대신 물가가 부진한 현상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시라카와 전 총재의 회고록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의 분량은 무려 744쪽에 달한다. 그가 오랜 시간 BOJ맨으로 근무하며 말단 사원부터 수장의 자리까지 올랐음을 감안하면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을 것이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을 다루기에 쉽지 않은 내용들이 있지만 한편으로 거듭된 세계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중앙은행의 대응 정책과 관련해 흥미로운 내용이 적지 않다. 시라카와는 방대한 분량의 책에서 지난 40년간 일본과 세계 경제에서 벌어진 사건을 분석하고 당시 대응의 잘잘못을 따진다. 실패한 정책을 분석한 백서의 느낌도 준다. 이 과정에서 세계금융 시장의 흐름이 확인되고 각국 중앙은행이 구조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일례로 유럽중앙은행(ECB)의 경우 통화정책회의 전날 이뤄지는 만찬에서 중요 논의가 이뤄지는 반면 BOJ는 철저하게 통화정책회의에서만 정책을 논의하도록 관례화돼 있다는 차이가 있다. 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와 BOJ의 통화정책회의에서는 정부 측 인사가 참여하느냐 여부가 큰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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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30년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 시라카와 마사아키 지음 | 박기영·민지연 옮김 | 부키 | 744쪽 | 3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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