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美 반도체법에 멍 드는 기업들…"디커플링은 환상, 中 자립만 도울 것"
[美 반도체법·IRA 1년]①
미국 내 제조업 투자 260조…30%가 반도체
中 상반기 반도체 수입 22.4% 줄어
美 반도체협회, 정부에 中 제재 자제 요청
日 정부 내부서도 불만
ASML "디커플링은 환상"
엔비디아 "中 자립만 도울 것"
1년 전인 지난해 8월6일 미국 반도체지원법(CSA)이 의회를 통과하면서 세계 반도체 산업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를 미국이 21세기 경제안보의 핵심 자산으로 규정하면서 미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구축 작업의 막이 본격적으로 올랐다.
그 후 1년, 동맹을 규합해 중국을 반도체 공급망에서 배제하려는 미국의 포위망은 점차 좁혀졌다. 특히 CSA를 근거로 520억달러(약 66조원) 규모의 보조금을 뿌린다는 소식에 삼성전자, SK하이닉스, TSMC 등이 미국으로 몰리면서 자체적인 공급망 구축에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이는 미국에 이어 유럽, 일본 등 각국의 보조금 출혈경쟁을 촉발하면서 '제로섬' 게임에 대한 우려를 키웠다. CSA 시행 이후 미국의 일방적인 대(對)중국 반도체 생산·수출 규제 또한 속도를 내면서 동맹과 글로벌 기업들을 멍들게 했다.
이 가운데 전문가들은 조심스럽게 미국이 반도체 산업에서 중국과 완전한 '디커플링(탈동조화)'에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다. 현재 국제 분업화가 최적화된 반도체 공급망을 고스란히 미국으로 들여온다는 것 자체가 환상인 데다 대중 제재가 이어지는 동안 중국도 기술 개발에 절치부심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견제가 반드시 중 반도체의 쇠퇴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반도체 기업, 美 투자 급증…동맹과 손잡고 中 포위망 구축
1일 주요 외신에 따르면 미국 CSA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 발효된 2022년 8월부터 올해 3월까지 발표된 미국 내 제조업 투자 계획은 2040억달러(약 260조원)에 이른다. 2021년 미국 전체 투자액의 2배, 2019년의 20배 수준이다. 총투자 건수 75건 중 약 30%인 21건이 반도체 관련 투자였다. 반도체 보조금 지원이란 '당근'과 함께 미국 내 공장 건설을 주문하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강한 압박에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투자 보따리를 풀었다. 삼성전자는 텍사스 테일러 공장, TSMC와 인텔은 각각 애리조나·오하이오 공장 투자를 결정했다.
중국을 향한 미 반도체 규제는 CSA 시행 이후 더욱 노골화됐다. 반도체를 '안보자산'으로 보는 미국은 지난해 10월 첨단 반도체 장비의 중국 수출을 제한하기로 하고 네덜란드, 일본에 동참을 요구했다. 반도체 원천기술을 보유한 이들 3개국은 장비 시장을 독과점한다. 현재 반도체 장비 시장 점유율 65.5%를 차지하는 상위 5개사가 모두 미국, 네덜란드, 일본 기업이다. 특히 미국은 네덜란드 ASML이 독점 생산하는 첨단 반도체 미세공정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수출 금지 품목에 포함함으로써 첨단 반도체 개발에 나서려는 중국의 손발을 완전히 묶었다.
올 3월엔 CSA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을 통해 미국의 보조금을 받은 반도체 기업이 중국 내 생산량을 첨단 제품은 5%, 구형 제품은 10% 이상 늘리지 못하도록 했다. 그 결과 중국의 타격도 현실화하고 있다. 중국의 상반기 반도체 수입은 전년 동기 대비 22.4% 줄어든 1626억달러(약 207조원)를 기록했다. 이 기간 중국 전체 수입 감소폭(-0.1%)을 크게 웃돈다. 미국이 첨단 반도체 및 장비에 대한 중국의 접근을 제한한 영향으로 분석된다.
中 보복, 업계 반발…TSMC는 공장 가동 연기
CSA 발효 1년간 한계도 명확히 드러났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중국의 보복 조치와 업계 반발, 동맹국의 우려로 대중 규제를 지속하더라도 상당한 진통을 겪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는 지난달 미정부에 대중 수출 통제 조치를 자제할 것을 공식 요청했다. SIA는 "세계 최대 반도체 시장인 중국에 지속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게 중요하다"며 "지나치게 범위가 넓고 모호하며 일방적인 제한을 위한 반복적 조치는 미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약화하고 공급망을 교란시킬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의 보복 조치를 우려해 반도체 업계가 긴급 대응에 나선 것이다. 앞서 중국은 미국 기업인 마이크론 제품의 자국 내 판매 금지, 반도체용 소재인 갈륨·게르마늄 수출 금지 등을 통해 미국에 맞불을 놨다. 전 세계 반도체 구매액의 3분의 1(1800억달러)을 차지하는 중국 시장을 등진다는 것도 기업 입장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손실이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통제를 따라온 일본 정부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온다. 미국이 경제 안보를 이유로 동맹국의 희생을 강요하고 기업의 경영활동을 과도하게 위축시키고 있다는 불만이다. 한 일본 경제산업성 관료는 지난달 일본이 첨단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장비 23개 품목을 대중 수출 통제 리스트에 추가한 뒤 한 외신에 "일본은 분쟁을 겪지 않는 한, 특정 국가를 제재할 수 없다"며 "우리는 미국이 일하는 방식에 불편함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일본은 중국이 일본산(産) 전기차 판매 금지 등 보복 조치에 나설 가능성 등을 우려하고 있다.
CSA에 따른 미국의 신규 반도체 공장에서 일할 전문 반도체 인력이 부족하다는 점 역시 미 자체 공급망 구축에 큰 걸림돌로 꼽힌다. TSMC는 최근 숙련인력 부족을 이유로 미국에 건설 중인 파운드리 공장 가동 시점을 2025년으로 1년가량 늦췄다. 미국 컨설팅기업인 매킨지앤드컴퍼니에 따르면 2030년까지 미 반도체 엔지니어와 기술자는 약 39만명 부족할 걸로 추산된다. 이 같은 반도체 숙련인력 부족과 높은 인건비 등으로 미국이 반도체 공급망에서 아시아를 결코 대체할 수 없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디커플링은 환상"…중국 반도체 자립 앞당길 수도
미·중 반도체 기술패권 경쟁의 압도적 우위는 현재 미국이 점하고 있다. 동맹과의 반(反)중 반도체 연합 전선이 그 토대다. 원천기술을 보유한 유럽·일본, 전 세계 반도체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는 한국·대만 등 아시아 국가와의 협력 등이 미국의 지원군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과 시장, 동맹국의 희생을 수반하는 반도체 정책은 결국 공급망을 교란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크다. 아시아보다 비용이 높은 미국에 반도체 제조 벨트를 구축하는 ‘리쇼어링(해외 진출기업의 국내 복귀)’ 구상도 허상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쏟아진다.
크리스토프 푸케 ASML 수석부사장은 최근 일본 니혼게이자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디커플링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며 "디커플링은 극도로 어렵고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드는 일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존 뉴퍼 SIA 회장은 반도체 산업 혁신의 비결은 "수십 년에 걸쳐 세계 곳곳에 매우 효과적으로 구축한 엄청난 공급망"이라며 공급망의 역할이 줄어들 것이란 생각은 "환상"이라고 일갈했다. 현재 반도체 생산은 한국·대만·중국 등이 주도하고 장비는 네덜란드(ASML), 설계는 영국(ARM), 연구개발(R&D)은 벨기에(IMEC) 등이 주된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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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중 견제가 오히려 중국의 반도체 자립만 가속화할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중국 정부는 최근 미국의 제재에도 2019년 출범한 2041억위안(약 36조원) 규모의 초대형 반도체 투자 펀드를 통해 반도체 기업 투자를 늘리고 있다. 특히 소재·부품·장비 업체 투자를 확대하며 반도체 산업의 기초체력을 강화하고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중국 기업들이 미국에서 칩을 살 수 없다면 자체 개발에 나설 것"이라며 "이는 중국의 반도체 자립만 도와줄 뿐"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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