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시각]또 다른 소희가 없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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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회사 그만두면 안 돼?" 엄마 아빠와 한 차를 타고 가던 앳된 얼굴의 딸이 투정부리듯 툭 하고 던진다. 어색한 침묵이 몇 초 흐른 뒤, 엄마는 "뭐라고 했니"라고 되묻고, 딸은 “들었으면서 못 들은 척…"이라고 혼잣말을 한다.


한국영화 최초로 지난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으로 상영된 정주리 감독의 영화 '다음 소희'의 한 장면이다. 실업계 고3학생 소희는 이날 자살 시도에서 깨어나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차마 일이 너무 힘들어서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과음 핑계를 댔지만, 고심 끝에 털어놓은 딸의 속내를 어려운 형편의 부모는 애써 흘려들었다.

학교의 교사도, 일터의 상사도, 부모도, 소희 주변의 어른 어느 누구도, 학생의 신분으로 인권 보호와 준법의 사각지대에 던져진 채 값싼 노동력으로 소진되는 소희를, 수많은 소희들을 버텨내라고 더 큰 성과를 내라고 몰아붙일 뿐이다.


아이는 죽을 힘을 다해 구조신호를 보냈지만 신호는 접수되지 않았고, 구조는 끝내 실패했다. 애견 돌봄을 전공했지만 콜센터로 실습을 나가 감정노동, 임금착취에 시달리다 학생이 자살했는데, 기업과 학교, 노동부와 교육청은 취업률과 실적, 인센티브에만 주목하며 ‘이게 현실’이고 ‘어쩔 수 없다’를 외치며 책임지기를 거부한다.

형사 오유진은 소희의 죽음을 수사하며 맞닥뜨린 무책임한 책임자들과 형편없는 기업, 무능한 국가 제도에 분통을 터뜨리며 "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으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이나 한다고 더 무시해. 아무도 신경을 안 써"라고 '어쩔 수 없는' 한국 사회를 향한 독설을 내뱉는다. 유서처럼 남겨놓은 핸드폰 동영상 속, 대가 없이 몰입해 활기와 열정을 불사르고 있는 소희의 춤사위가 큰 스크린에 몇 분간 흐르는 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후련한 카타르시스의 눈물마저 사치인 듯 싶었다.


영화 '다음 소희'는 2017년 1월의 LG유플러스 고객센터 현장실습생 사망사건 실화를 모티브로 했고, 해외 영화제들에서 쏟아진 호평에 노동계, 정치계 단체관람 바람까지 불며 이슈가 되고 있다. 이 영향인지, 법안 발의 1년이 넘도록 국회 상임위에서 한 차례의 심의도 되지 않은 직업교육훈련촉진법(직촉법) 개정안이 지난 22일 여야 합의로 국회 교육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통과했다.


기존 직촉법에서는 직업계고 현장실습생은 근로기준법 조항 중에서 ‘18세 미만자를 도덕상 또는 보건상 유해·위험한 사업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제65조 사용금지 조항, 4시간 근무하면 최소 30분 이상, 8시간 근무하면 1시간 이상의 휴게시간을 근로시간 중에 주도록 한 제54조 휴게 조항, 제73조 생리휴가, 제72조 갱내근로의 금지 조항만 적용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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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통과한 개정안에 따라 근로기준법 적용 조항이 확대되면서 현장실습생에 대한 강제근로, 폭행, 중간착취, 직장내 괴롭힘이 금지됐고, 기능 습득과 관계없는 업무도 시킬 수 없게 됐다. 당연히 벌어지면 안 되는데, 이제야 겨우 법으로 금지되고 보호받도록 개정된 현재 한국 노동현실이 안타깝다. '다음 소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정부가 2027년까지 열어젖히겠다 공언한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는 무의미하다.


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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