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정두환 트렌드 매니징에디터] 아일랜드어는 유럽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다음으로 오래된 문헌 기록을 가진 언어다. 기원 후 1000년 무렵까지는 공격적 확산을 이어가던 언어였다고 한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 언어는 아일랜드 내에서 조차 애착을 가진 사용자는 9000명에도 못 미치는 실정이다. 사실상 역사로만 남게 된 언어인 셈이다. 아일랜드 내 모든 학교에서 가르친 이 언어가 이처럼 소멸 위기를 맞은 것은 집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으면서 시골 농부들이나 쓰는 말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영국의 인류학자 대니얼 네틀과 언어학자 수잔 로메인이 쓴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의 한 대목이다. 저자들은 "지난 500 년 간 우리에게 알려진 세계의 언어 가운데 거의 절반이 사라졌다"며 "언어의 소멸은 고대 제국이나 낙후된 오지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다"라고 경고한다.
‘한글’이라는 우리 언어는 소멸의 위기에서 자유로울까. 최근 벌어진 ‘심심한 사과’ 논란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깊고 간절한 마음이라는 의미의 ‘심심(甚深)’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 ‘지루한’으로 오역한 것을 두고 많은 기성 세대는 ‘젊은 층의 무지’를 한탄한다. 그런데 주변의, 나름 똑똑하다는 젊은 세대조차도 "사실 이번에야 이 단어의 진짜 뜻을 알았다"며 "우리가 알던 그 ‘심심’으로만 생각해 왔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한글이 과학적이며 우수한 언어라고 교육 받고 또 자부심을 가지고 자랐다. 예쁜 순 우리말을 알게 되면 풀숲에서 네잎클로버를 찾은 것처럼 신기해 하기도 했다.
그런데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한글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K 컬처’의 전세계적 확산으로 한글을 배우려는 외국인이 늘고 있다는 소식에 뿌듯함을 느끼지만 정작 안에서 한글은 외국산 언어는 물론 국적 불명의 신조어 홍수 속에 위기를 겪고 있다.
언어는 세대간 소통마저 어렵게 하고 있다. ‘데자뷔’의 반대말이 ‘뷔자데’라는 한 방송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어이없어 하며 웃었다면 당신은 이미 세대간 소통이 어려운 사람일 수도 있다. ‘뷔자데’란 단순히 말 순서를 뒤집어 놓은 말장난이 아니라 ‘매일 겪는 익숙한 일을 낯설게 느낀다’는 의미를 가진 ‘신조어’이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는 한글의 유난히 어려운 ‘맞춤법’에 의외로 거부감이 크다. 특히 띄어쓰기는 글쓰기를 밥벌이로 생각하는 기자들조차 늘 헷갈려 한다. ‘할 수 있다’를 ‘할수 있다’로 쓴다 한들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왜 이걸 꼭 지켜야 하느냐는 불만도 있다. 우리는 ‘킹왕짱’이라는 국적불명의 표현을 나무라지만 젊은 세대는 "의미가 확실하잖아요"라며 반문한다.
물론 그들의 언어 파괴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틀렸다"라며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식의 강압적 해법은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곱고 아름다은 우리말을 씁시다"라는 캠페인도 이미 효력을 상실한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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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어려운 한자어 식 표현을 ‘식자의 상징’처럼 여겨온 우리 사회의 관습이 한글의 위기를 불러온 것인지도 모른다. 왜 꼭 굳이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을 써야 하는지 우리 스스로 반문해 볼 일이다. 새로운 세대의 언어를 탓할게 아니라 그들의 언어 습관을 고민하고 이해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글 역시 아일랜드어처럼 시골의 노인들이나 쓰는 소멸된 언어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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