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회 칸영화제 마무리
사적인 취재노트
전쟁 같던 취재기

[여기는 칸, 그후] 칸영화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취재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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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이슬 기자] 이제야 비로소 칸을 보낸다. 올해는 잊을 수 없는 영화제로 기억될 거 같다. 그만큼 좋았고 기뻐했고, 또 고됐다. 하루가 48시간처럼 느껴질 만큼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K무비의 위상을 전세계 무대에서 실감한 기분 좋은 취재였다. 지극히 개인적인 12일간의 취재기를 정리한다.


75회 칸 영화제가 지난달 17일 개막해 28일 막을 내렸다. 국내 언론 중 유일하게 3회 연속 취재에 나섰다. 프랑스 칸 팔레 드 페스티벌 센터에 있는 기자실에 들어서니 2019년 72회 '기생충'의 황금종려상 수상을 현지에서 취재하던 때가 생각났다. 일시적 영광에 지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한국으로 향하던 모습이 떠오르며 감회가 남달랐다. 아울러 지난해 송강호가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고 이병헌이 폐막식 시상자로 무대에 오르는 74회를 취재하며 칸의 달라진 예우를 지켜본 바. 올해는 정점을 찍었다.

칸에 가기 전부터 어느 정도 감지됐다. 지난해 '오징어게임'으로 월드스타가 된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 '헌트'가 칸에 간다는 이야기가 공식발표 전부터 영화계에 알음알음 나돌았다. 꽤 설득력 있었다. 칸은 영화제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이정재 카드'에 손을 뻗었다. 2019년 날 선 시선 속 한국영화에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안겼던 칸에게는 이러한 K문화의 흐름이 반가웠을지 모른다. 외면할 수도 없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보는 쪽이 맞을 수도 있겠다.


칸의 노림수는 제대로 적중했다. 이정재는 칸 영화제를 누비며 특급 게스트 활약을 톡톡히 했다. 현지에서는 인터뷰를 신청한 외신 매체의 수가 역대 최고라는 말이 나왔다. '누구누구보다 더 많다더라'는 이야기가 솔솔 들렸다. 어마어마한 관심 속 열린 프리미어 스크리닝을 향한 관심도 뜨거웠다. 뤼미에르 극장에 들어서기 위한 관객의 줄이 멀리 카지노 앞까지 늘어서는 진풍경도 연출됐다. 취재진도 영화를 보기 위해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입장했다.

자정에 공개된 '헌트'는 말 그대로 '미드나잇' 스크리닝이었다. 국내 취재진에게는 '헌트'가 첫 공식일정이었다. 영화가 끝나니 새벽 3시. 숙소로 도착해 기사를 쓰기 시작하니 어느새 날이 밝았다. 가자마자 밤샘 일정을 소화하고 녹초가 됐다. 미드나잇 일정이 초반에 자리하면 체력적으로 쉽지 않다.


칸에서 만난 이정재·정우성은 더욱 눈부셨다. 턱시도를 입으니 훤칠했다. 누가 지천명(知天命)이라 믿을까. 올해 '헌트' 팀은 따로 다루고 싶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청담동 부부'인 이정재·정우성의 솔직함과 노련함이 빛났다고 해야 맞겠지만. 다시 취재기로 돌아가면, 칸영화제 무대는 공력있는 천하의 이정재도 떨게 했다. 데뷔작을 무려 칸에서 선보이는 마음이 오죽했을까. 마음 놓고 시원하게 미소 짓지 못했다. 물론 이틀 뒤 국내 취재진과 만났을 때는 비로소 여유를 되찾은 듯 시원시원한 입담을 과시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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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이 이정재와 함께 깜짝 카드로 내세운 톰 크루즈가 올해 영화제의 문을 성대하게 열었다. 이들의 영화를 보기 위해 거리 가득 밀려드는 관객을 보면서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칸영화제는 '탑건'의 프리미어 시사회 날 공군 전투기를 띄웠다. 전투기의 굉음이 지축을 울리며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현지에서 만난 한 관계자는 "톰 크루즈가 레드카펫을 걸으면서 계속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고 했다. '탑건' 팀도 예정된 이벤트가 몹시 기대됐던 모양이다. 현지에서 '탑건'을 관람한 후에야 이 이벤트가 왜 특별한지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뜨거운 열기에 칸이 들썩였다. '어쩌면 우리도 곧?' 부러움은 곧 기대로 바뀌었다.


할리우드 대형 작품을 홍보하던 벽보가 있는 마제스틱 호텔 앞에 CJ ENM의 '헤어질 결심'과 '브로커'의 포스터가 채워져 있었다. 참고로 마제스틱은 칸영화제가 자체적으로 최고 레벨의 초청 감독·배우에게 숙소를 배정하는 최상위 호텔이다. '얼마가 들었을까?' 싶은 찰나, 고개를 들어보니 호텔 벽면에 배우 탕웨이와 박해일의 얼굴 사진이 붙어 있었다. '올해도 일이 나겠구나' 기대가 커졌다. 물론 광고판과 칸영화제의 수상 결과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겠냐마는, 어쨌든 현지 광고 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을 터. 투자 효과를 기대하고 광고를 집행하는 게 아닌가.


칸 영화제 필름마켓 입구에도 '헤어질 결심'의 포스터가 있었다. 2019년 '기생충'의 포스터가 있던 그곳이다. 기대감이 자라났다. 동시에 황금종려상을 받으면 현지를 취재 중인 기자에게는 어떤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는지 겪어본 바. 공포와 걱정이 밀려왔다.


현지에서 영화 '트라이앵글 오브 새드니스'(Triangle of Sadness)가 좋다는 다수 관계자의 말이 들려왔다. 국내 일부 매체에서는 '슬픔의 삼각형'이라고 표기하기도 했지만, 본지는 올해 칸영화제 폐막식을 취재해 보도하면서 영문 그대로 표기했다. 번역체가 작품을 온전히 담지 못한다는 판단에서다. 수입사 그린나래미디어는 원제 그대로 개봉한다고 2일 밝혔다. 칸이 사랑하는 다르덴 형제 감독이지만, 그들에게 황금종려상을 주진 않을 것이고.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이 가져갈 거 같다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루벤은 수상 직후 포토콜에서 루벤은 기쁨에 포효했다. '더 스퀘어'로 2017년 70회 황금종려상을 수상한지 5년 만에 또 다시 영광을 안은 젊은 감독의 행보가 궁금해졌다.


'기생충'은 칸의 모든 수상 기준이 됐다. 당시 칸에서 상영 직후 터지던 박수와 환호, 분위기, 관객들의 표정. 이를 보며 느꼈던 감정을 잊을 수가 없다. '헤어질 결심'은 잘 만든 영화라는 인상이 강했다. 보편적인 정서를 상업적으로, 매우 훌륭히 만졌다. '브로커'도 좋았지만, 두 편 모두 상영 직후 분위기로 보면 황금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브로커'도 좋았지만, 칸의 마음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 수상 결과를 쉽게 예단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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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 ENM 이미경 부회장이 '헤어질 결심'과 '브로커'의 프리미어 스크리닝에서 박찬욱 감독과 배우 송강호의 옆을 지키며 힘차게 박수를 보냈다. 이 부회장은 2019년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감독 봉준호) 공식 상영을 앞두고 '박쥐'(2009) 이후 10년 만 칸을 찾아 힘을 보탠 바. 3년 만에 다시 칸으로 향했다.


'올드보이'로 칸 영화제에 한국영화를 향한 신뢰의 씨앗을 심은 박찬욱 감독은 '기생충'의 황금종려상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분명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일 터. 상영을 앞두고 칸에서 가진 티타임에서 박 감독은 수상을 예상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극장과 영화계가 살아나길 바란다"고 답했다. 그리고 수상 직후 무대에 오른 박 감독은 이를 소감으로 밝혔다.


현지에서 만난 박 감독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헤어질 결심'을 향한 외신 반응도 좋았다. 광고가 표기된 외신 인터뷰도 눈에 띄었다. 박 감독이 빈손으로 돌아가고 말고를 논할 문제는 아니었다. 수상한다면 감독상이 가장 유력해 보였다.


배우 송강호는 황금종려상 수상과 심사위원으로 2년 연속 칸을 누볐다. 이를 현지에서 취재하면서 칸영화제 측이 극진히 예우를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만, 국내 배우가 칸에서 그런 '대접'을 받는 모습은 익숙하게 보던 풍경은 아니었다. '브로커' 상영 당시 카메라가 유독 송강호의 모습을 많이 비췄다.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은 큰 박수를 이끌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송강호를 반겼다. 송강호는 "영화제는 스포츠가 아닌 축제"라고 했지만, 그가 얼마나 칸 연기상을 바라는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난해 칸에서 심사하며 코피를 쏟을 만큼 고생했고, '기생충'이 오스카 레이스를 펼칠 때 스케줄을 모두 접고 봉준호 감독의 곁을 지키면서 함께한 송강호 아닌가.


올해 아시아 배우가 남녀연기상을 받아 갔다. 칸영화제에서 흔히 마주하는 풍경은 아니지만 이런 일도 보는구나, 감회가 새로웠다.


폐막식 직후,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은 수상자 박찬욱 감독과 송강호가 기자실로 향했다. 송강호는 '기생충' 수상 직후 봉준호 감독과 기자실을 찾은 바 있어 제법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박찬욱 감독은 기자실에 오는 길에 몇 번 붙잡혀 인터뷰를 해야 했다. 기자들은 기자실에 들어서는 이들을 박수로 맞았다. 칸 취재 규모도 제법 커지고 있다. 올해는 방송사 취재가 꽤 늘었다. 3년 전에는 오손도손 기자들과 만나는 분위기였다면, 올해는 마치 소규모 기자회견을 방불케 했다. 들뜬 소감보다는 정돈된 말이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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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번째 칸 영화제 포스터는 짐 캐리 주연의 영화 '트루먼 쇼'의 엔딩을 오마주 했다. 포스터를 보면서 칸이 엔데믹 영화계를 향한 메시지를 녹였다고 느꼈다. 문을 열고 세트장에서 탈출한 짐 캐리는 어떻게 살았을까. 그가 마주한 풍경은 어땠을까. 마찬가지로 엔데믹 영화계는 어떤 모습일까. 칸영화제도 진짜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재치 있게 이를 포스터를 넣은 게 아닌가 싶었다.


올해 칸영화제를 취재하며 누구보다 격하게 관객들이 다시 영화를 사랑해주길, 극장으로 들러주길 바라는 마음을 느꼈다. 박찬욱 감독은 준비한 소감을 통해 "영화관을 지키면서 영화를 영원히 지켜낼 것"이라고 했다. 현지에서 아시아경제와 만난 정우성은 "칸영화제도 좋지만, 한국에서 '범죄도시2' 흥행 소식이 더 기쁘다"며 "국내 관객들이 영화관으로 돌아와 극장이 살아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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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도 질병의 공포와 싸워야 했던 취재였지만, 엔데믹 영화의 희망을 봤다. 작품이 좋으면, 관객은 얼마든 오리라는 것을 칸이 입증했다. 우리는 칸에서 계속 웃을 수 있을까. 당분간 한국영화가 견제의 시선을 받을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분명한 건, K무비의 위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인지도를 넘어 달라진 전세계 신뢰를 느꼈다. 우리 영화인의 끝없는 노력과 진화가 이뤄낸 결과라는 데 의견이 모인다. 새로운 숙제도 받았다. 제2의 박찬욱, 봉준호, 송강호의 부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K문화의 진화는 이제 시작이다.


이이슬 기자 ssmoly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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