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수의 책으로 읽는 세계] 포퓰리즘이 괴물처럼 날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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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보수화로 불리든, ‘이대남’으로 불리든 ‘20대 현상’은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다. 우리만의 일은 아니다. 암담한 세상에 지친 청년들이 민주주의 자체에 불만을 품고 포퓰리즘에 빠져드는 현상은 선진사회 전체에 만연하다.


2016년 야샤 뭉크 존스홉킨스대 교수와 로베르토 포어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의 밀레니얼 4명 중 1명은 자유 선거를 부정했다. 시민권을 민주주의의 필수요소로 여기는 사람들 비율도 3분의 1에 불과했다. 기성세대보다 낮은 수치였다. 브렉시트의 영국은 물론이고, 유럽 각국에서도 청년층의 민주주의 이탈은 심각했다.

신자유주의가 빚어낸 만성적 실업, 만연한 비정규직, 엘리트 세습과 사다리 걷어차기, 승자 독식과 양극화 등이 직접 원인이었다. 여기에 불을 댕긴 것은 기성 정치의 타락과 부패, 무지와 외면, 무능과 책임 전가였다.


고통을 호소해도 정치가 나와 상관없이 굴러가는데, 투표는 왜 하는가. 내가 선거한 정치인이 내 문제 해결에 관심 없는데, 민주주의가 무슨 쓸모인가. 기대는 실망이 되고, 실망은 무관심이 되고, 무관심은 울화가 됐다. 포퓰리즘을 등에 업고 ‘분노 청년’이 곳곳에서 들고일어섰다. ‘20대 현상’도 이런 세계적 흐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책 ‘급진의 20대’에서 청년 사회학자 김내훈은 ‘20대 현상’을 비난도, 환멸도 하지 말고 정확한 인식을 통해 희망의 재료로 삼자고 주장한다. 그는 “지속적 일자리 감소, 이를 가속하는 자동화, 불가피한 계층 하강, 기후 변화, 자원 고갈 등 혼돈 속에서 실존적 위협”에 시달리는 20대 청년을 ‘가장 위태로운 세대’라고 호명한다. “괴물이 되어버린 세대”나 “혐오와 열패감으로 찌든 한남”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촉발한 위기에 민감히 반응하면서 근본적 대안을 찾아 분투 중인 세대란 뜻이다.


청년세대 마음에 자리 잡은 인생 중심 감각은 ‘불공정’이다. 젠더 전쟁을 치르는 중이지만, 이 세대의 남녀 모두 희망 없는 세상에서 생겨난 사회적 책임을 청년 개개인이 지는 건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책임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온 기성세대와 엘리트 집단이 져야 한다는 것이다.


2018년 평창 올림픽 ‘남북 단일팀 구성’에서 이 세대의 공감은 노력 끝에 출전권을 땄는데 자격을 박탈당한 선수 개개인의 억울함에 쏠렸다. 20대는 이를 ‘불공정’으로 성토했다. 통일 같은 추상적 가치가 개인의 구체적 현실을 침범하는 걸 이들은 참지 않았다. ‘보람 따위는 됐으니 야근 수당이나 주세요’였다.


20대가 말하는 공정은 인식보다는 감각, 즉 ‘공정하지 않아요!’라는 단말마에 가깝다. 단단한 인식과 구체적 내용이 빠져 있다. 전체 사회가 어떻게 균형 있게 몫을 나누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룰까에 대한 비전도 없다. 차라리 ‘나한테 불리하지 않게!’에 가깝다. 따라서 이들이 말하는 공정에 주목하면 문제가 오히려 꼬인다. 실제로 이들을 움켜쥔 것은 불안정한 삶과 어두운 앞날이기 때문이다.


20대 청년은 한국 현대사 최초로 부모 세대보다 가난해질 위기에 몰려 있다. 세습할 지위나 재산이 없는 중산층 이하 청년이 느끼는 불안과 고통의 강도가 훨씬 크다. 게다가 이들은 학력-일자리 불일치가 가장 심한 세대에 속한다. 역사상 가장 높은 실력(스펙)을 쌓고도, 다수가 비정규직, 계약직, 프리랜서 등 불안정 일자리를 전전하는 신세다. 이들의 삶은 ‘노오력의 배신’으로 점철돼 있다.


희망을 잃은 20대는 우울과 불안에 시달린다. 이들의 심리적 방어기제가 경멸과 혐오다. 경멸은 “타인을 정당치 않게 폄훼함으로써 자신을 평가절상하는 것”이고, 혐오는 “내 문제를 탓할 존재를 찾아내 ‘그들’을 축출하는 것”이다. 이주민, 하층민, 난민, 여성, 노인, 어린이, 장애인, 비정규직 등 이들은 경멸하고 혐오할 ‘그들’을 수시로 생산하고 공격하며 배제에 열중한다.


특히, 20대들은 나보다 못한 존재가 잘되는 꼴은 못 본다. 어떻게든 희생양으로 만들려 애쓴다. 언뜻 보면, 이들은 이성적 해결책 대신 감정적 통쾌함을 추구하는 듯 보일 정도다. ‘정체성 정치’에 위험에도 페미니즘이라는 대안 세계관이 있는 20대 여성보다 온라인 ‘안티 네트워크’밖에 손에 쥐지 못한 20대 남성의 강박감이 심각하다.


사회적, 경제적 불안정과 결합해 있기에 이 혐오는 도덕적 훈계나 ‘팩트 폭격’으로 해소될 수 없다.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새로운 우리’, 즉 타자를 경멸하거나 혐오하지 않아도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공동체를 구축하지 않고는 누구도 이들을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기성 정치는 이들을 철저히 배반했다.


1990년대 이후 태어난 20대들이 지금껏 만난 정치는 진보적 신자유주의(자유주의적 보수)와 반동적 신자유주의(권위적 보수)뿐이었다. 대선의 표가 갈렸듯, 차이는 있으나, 둘 다 대안은 아니다. 불평등과 양극화 문제를 서서히/빠르게 악화시킬 뿐 해결하진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 정치학자 샹탈 무페 말대로, 코카콜라와 펩시콜라 차이에 불과하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열망은 들끓는데, 정치가 ‘노답’일 때,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서 ‘다른 대안’을 상상하려 애쓴다. 브레히트 말처럼, “올바르지만 오래된 것보다 차라리 나쁘더라도 새로운 것이 낫다”라고 생각한다. 포퓰리즘적 열망이 그 자리를 빠르게 가로챘다.


포퓰리즘의 등장은 정치 위기의 심각한 증후다. 포퓰리즘은 답 없는 현실에서 현실적 한계를 무시하는 ‘가짜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을 유혹한다. 특히, 그것은 혐오를 먹고 자란다. 사회를 ‘순수한 우리’와 ‘불순한 그들’로 갈라친 후, ‘그들’에게 책임을 모두 떠넘김으로써 진짜 문제를 은폐하고 해결을 지연하거나 심화한다. 타인을 혐오한다고 내 항아리에 쌀이 차진 않는다. 포퓰리즘은 ‘몰락에 대한 불안’을 해소할 방법을 찾자는 절규로 들어야 한다.


따라서 ‘20대 현상’의 해결책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없다는 불안, 그 불안을 낳은 사회구조에 대한 불만”을 직시할 때 비로소 마련될 수 있다. 지금까지처럼 정치가 이들의 호소에 귀 닫으면, 장애인을 ‘그들’로 만드는 포퓰리즘이 괴물처럼 날뛴다. 부디 정치가 빠르게 해답을 찾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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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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