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日 학자 북한산성 행궁 조사‥ 수십 년의 문화 침탈 시작
조선의 고건축·성곽·고분 조사 결과, 역사 왜곡 기초자료로 활용
항일 투쟁의 공간 상징성 지닌 조선의 성(城)과 성곽들 파괴

고양 북한산성 관성소지 및 상창지 [고양시]

고양 북한산성 관성소지 및 상창지 [고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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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라영철 기자] 조선의 성곽은 국가방위의 근거지이자 외세에 대항하는 투쟁의 공간이었다.


이 가운데 북한산성은 수백 년 동안 수도 한양의 도성(都城)을 호위하고 도성 주민을 지켜온 방어기지였다.

1905년 무렵, 일제(日帝)는 의병 활동을 막는다는 구실로 북한산성 일대를 대대적으로 수색한다.


이후 북한산성 안에 일본군 헌병분견소까지 설치해 북한산성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둔다.

그러나 조선의 지배층과 백성은 북한산성에 들어가 적과 싸울 진지를 구축하지도 않았다.


조선의 성(城)이 사실상 적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다.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탄(竝呑) 뒤 북한산성은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는다.


산성에는 원인 모를 불이 자주 났고, 주인 잃은 산성은 한때 서양의 한 종교단체에 행궁을 내주기까지 했다.


성(城)을 지켜줄 백성조차 없어 성곽은 방치됐고, 군사시설물은 버려졌다.


큰 홍수가 나 성 안의 시설물들이 떠내려갔고, 일제가 행궁 건축물을 헐어가 북한산성은 폐허나 다름없이 변해갔다.


북한산성은 그렇게 나라의 운명과 함께 제국주의 침략 아래 힘없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옛 성터에 성곽을 다시 쌓은 지 200여 년 만의 몰락이었다.


온갖 시련을 버티며 엮어온 천 년 성(城)의 역사도, 그 역사를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도 서서히 묻혀갔다.


당시 조선은 왕조국가였지만 왕권은 미약했고, 지배층은 혼란을 헤쳐 나갈 힘을 잃은 지 오래였다.


게다가 외세에 대적할만한 군사력도 뒷받침되지 못했다.


북한산성의 쇠락은 일본의 조선 지배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침략의 근거며, 일본의 '조선 고건축 조사'에서 찾을 수 있다.


고양 북한산성 관성소지 및 상창지 (일본 가큐슈인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소장 자료) [고양시]

고양 북한산성 관성소지 및 상창지 (일본 가큐슈인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소장 자료) [고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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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문화침탈 내막은 이렇다.


1902년, 일본인 고건축 전문가인 세키노 타다시(1867~1935)가 북한산성을 찾는다.


고건축과 고미술 전문가로 구성된 학자들과 함께 온 그는 성곽 곳곳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북한산성 내 건축물과 시설물을 하나씩 점검했다. 사찰과 관아지 건물, 군사시설인 무기창고와 식량창고도 둘러봤다.


특히 북한산성 행궁에 큰 관심을 갖은 그는 건축물을 면밀히 조사하고 사진으로 기록까지 남겼다.


세키노 타다시가 행한 이날의 북한산성 행궁 조사는 이후 수십 년에 걸쳐 행해질 일제 문화 침탈의 시작이었다.


또한 식민지 지배를 위해 동원된 '조선 문화재 연구'와 훼손의 서막이기도 했다.


세키노 타다시가 이끈 작업은 도쿄제국대학교 명의로 2개월에 걸쳐 시행된 '조선 고건축 조사 사업'의 하나였다.


표면상으론 학술 연구단 활동이었지만, 실상은 일본 정부와 관이 주도하는 국가 규모의 사업이었다.


그들은 서울과 개성, 경주에 있는 성곽, 궁궐, 능묘, 서원, 석조물 등을 파악하고 조각과 공예 분야도 조사했다.


'조선 고건축 조사'는 그로부터 7년 뒤인 1909년에 다시 시작된다.


조선통감부의 지휘 아래 이전보다 규모가 훨씬 큰 조사 사업으로 추진됐다.


당시 통감부는 조선의 국정을 사실상 장악했던 통치기구였다.


조선 고건축 조사는 조선통감부가 실시한 식민화 정책의 하나로 기획됐던 것이다.


'고건축물 조사 촉탁'이란 신분을 가진 세키노 타다시의 한반도 전역에 대한 고건축과 성곽, 고분 조사는 1915년까지 계속됐다.


학술연구라는 명목으로 조선의 많은 유물이 일본으로 유출됐다.


조선 고건축 조사 결과는 이후 조선 문화재 수탈과 역사 왜곡의 기초자료로 활용됐다.


고양 북한산성 관성소지 및 상창지 성벽 [고양시]

고양 북한산성 관성소지 및 상창지 성벽 [고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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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 조선이 오래전에 일본의 통치를 받은 민족임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조선 식민지화 정책의 근거를 마련하려 했다.


'삼한 정벌(三韓征伐)'과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에 의한 한반도 지배 주장이 그 대표적인 역사 왜곡 사례다.


고대 일본이 한반도를 정벌해 삼한(三韓)인 신라와 백제, 고구려를 복속시켰으며, 가야 지역에 통치기구인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6세기 중반까지 약 200년 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게 일본의 주장이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려고 조선의 문헌과 유물, 유적 등의 사료를 조작하고 왜곡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의 성곽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은 진주와 부산, 창원 등 한반도 남단 지역 성터와 성곽을 '삼한 정벌' 시기와 '임나일본부' 시대에 조성한 성지(城地)나 성곽으로 단정하며 조선 지배의 정당성을 주창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남해안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구축한 약 30개 소에 이르는 성곽을 일제강점기에는 적극적으로 보전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울산과 사천 등지의 왜성(倭城)에 벚나무를 심고, 성곽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해 일본 민족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 조선 지배가 역사적으로 정당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려 했던 것이다.


일제는 왜성뿐 아니라 백제시대의 성곽 보존에도 관심을 쏟았다. 공주 공산성을 공원으로 만들고 부여 부소산성에 신궁 조성을 꾀했다.


백제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역사 왜곡을 전제로 고대에 이미 조선과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관계에 있었다고 선전함으로써 반일 감정을 사전에 차단하고 더해 조선인을 전쟁에 쉽게 동원하려 했다.


옛 사진으로 본 고양 북한산성 관성소 및 상창 (1911년 6월 5일 노베르트베버 신부와 독일 총영사 크루거 박사 일행) [성 베네딕토 왜관수도원 소장 자료]

옛 사진으로 본 고양 북한산성 관성소 및 상창 (1911년 6월 5일 노베르트베버 신부와 독일 총영사 크루거 박사 일행) [성 베네딕토 왜관수도원 소장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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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일본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조선이 승리를 거둔 성곽들은 훼손하거나 방치하는 등의 이중적인 정책을 취했다.


반일 감정을 희석시키고 식민정책에 대한 저항정신을 약화시키기 위해선 항일투쟁의 공간이라는 상징성을 지닌 조선의 성곽을 하루빨리 없애야만 했던 것이다.


일제의 성곽 정책은 1905년 무렵 맨 처음 대구의 성곽을 없애 도로로 만들면서부터 시작됐다.


이후 성벽처리위원회를 만들어 도성인 한양 성곽 중에서 숭례문(남대문) 좌우의 성곽부터 헐어버렸다.


이어 '전주읍성'과 '남원읍성' 등 지방 읍성의 성벽도 차례로 철거했다.


한일 강제 병합 이후엔 '돈의문(서대문)'과 '소의문(서소문)', '혜화문(동소문)'을 없애고 경복궁의 건물 대부분이 철거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숭례문'과 '흥인지문(동대문)'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가 이 문을 통해 입성했다는 역사적 유래를 들어 보존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처럼 일제의 성곽 정책 아래 조선의 성곽은 처참히 훼손되고 변형되고 파괴돼 갔다.


그 하나의 사례가 바로 북한산성의 몰락이다.


때문에 세키노 타다시는 북한산과 북한산성의 정취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던 것이었다.


한 학자의 북한산성 행궁 조사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조선의 성(城)과 성곽들을 처참히 훼손하고 파괴할 줄이야…


참고·인용: 『성(城)과 왕국』, 조윤민, -주류성- · 경기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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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고양시


라영철 기자 ktvko258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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