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산책] 재영 책수선 - 흐트러진 기억의 조각은 다시 내게 선물이 되었다
마포구 ‘재영 책수선’
美 대학원서 북아트·페이퍼 메이킹 전공
책 제작보다 수선하는 일에 더 매력 느껴
손님들 대부분 낙서·흔적들 보존 원해
낡은책을 그저 새 책처럼 고치는 게 아니라
책의 기억을 관찰하는 게 이 일의 매력
[아시아경제 강주희 기자] 무엇이든 시간이 흐르면 빛이 바래고 때가 타기 마련. 물리적인 힘에 의해 망가지거나 주변 환경의 영향으로 훼손되기도 한다. 그럴 때 보통은 낡은 것을 버리고 ‘신상’을 마련한다. 상점에 가면 기존에 쓰던 것과 비슷한, 혹은 훨씬 더 좋은 물품이 무수히 많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쉽게 버리지 못하는 물품도 있다. 쓸 수 없을 지경으로 낡았더라도 사물에 담긴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 담겨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어렸을 적 끼고 살던 인형이나 이불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이의 체취가 담긴 옷이나 신발, 시계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럴 땐 원래의 상태와 기능을 오래 유지할 수 있도록 수선이나 수리를 맡기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물품이 책이라면 어떨까.
망가진 책을 말끔하게 고쳐주는 곳.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재영 책수선’을 찾았다. 책 수선이라는 개념이 다소 낯설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던 일은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곳곳에 ‘공방’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수선해주는 곳들이 제법 있는 편이다. 지금은 수선을 해가면서까지 책을 애지중지하려는 이들이 많지 않지만 인쇄매체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시대, 즉 멀티미디어 세상이 본격 열리기 전까지는 스스럼없이 책 수선을 맡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읽던 동화책,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유품과도 같은 오래된 책, 이제는 절판돼 구할 수 없는 서적, 혹은 사연이 없더라도 그저 깨끗하게 고치고 싶은 애장서적을 ‘재영 책수선’에서는 튼튼하면서도 깔끔하게 복원해준다. 타임머신을 타고 책의 시간을 역주행하게 해주는 셈이다.
그런데, 휴대폰이 점령한 시대에 ‘재영 책수선’이라는 곳이 인스타그래머들 사이에 이름 난 것은, 그만의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수선 서비스를 받기 위해 ‘멀쩡한 책을 일부러 망가뜨리고 싶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라고 한다.
미국의 대학원에서 북 아트와 페이퍼 메이킹을 전공했다는 이곳의 배재영 대표는 책 수선이라는 일을 도서관에서 맞닥뜨린 후 배웠다고 한다. 대출을 받거나 공부를 하는 곳이 도서관 아니던가 싶지만, 사실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친 책이 배겨나지 못하고 훼손되기 쉬운 탓에 수선을 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그는 "요즘에는 일부러 던지거나 찢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실 파손된 책을 접할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며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책 속의 내용과 함께 겉모양까지 집중해서 보게 됐고, 망가진 책을 복원하는 과정까지 마음껏 관찰하면서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실은 먼저 책 제작 기술을 배워볼까도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낡은 책을 수선하는 일에 매력을 더 느끼게 됐다"고 했다. 파손된 책의 독특한 모양이 가진 묘한 느낌, 또 복원하는 과정에서 책의 구조와 형태에 관심이 갔다는 것이다.
수선은 의뢰가 들어온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장 한 장 살펴보는 작업부터 시작된다. 책의 크기와 분량이 클수록 더 많은 시간과 끈기가 필요하다. 수선 방법은 책의 형태나 파손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면밀한 관찰은 예외 없이 거쳐야 하는 절차다. 책의 만듦새나 종이의 재질과 상태 등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알맞은 수선 방향을 결정할 수 있어서다.
배 대표는 "단순히 몇 개의 낱장이 찢어졌다며 책 수선을 의뢰받더라도 꼼꼼히 살펴보면 의뢰인이 미처 확인하지 못한 파손 부위가 발견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며 "이 단계를 거치고 나면 수선 방향을 의뢰인과 의논해 결정하고 작업을 진행한다. 책 상태가 제각각이기 때문에 수선 방향 역시 다양하게 나뉜다"고 설명했다.
수선 의뢰가 들어오는 책은 하나하나가 소중하다고 한다. 맡겨지는 책은 대부분 특별한 사연과 주인의 각별한 기억과 애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배 대표는 낡은 앨범이 수선된 후 의미있는 선물로 전해진 일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그는 "보관상태가 좋지 않아 곰팡이가 슬고 많이 망가진 앨범 수선을 의뢰받았는데, 결혼기념일에 맞춰 아내에게 선물하고 싶어 했던 케이스"라며 "그런 마음이 감동적이었고, 특별한 선물을 제작한다는 점 때문에 더욱 집중했던 것 같다"고 했다. 책 수선은 단순히 책을 고치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중했던 추억을 되새기고 환기할 수 있는 하나의 창작물을 만드는 작업임을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배 대표는 책 수선가를 ‘책의 기억을 관찰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수선을 맡긴 손님들이 책에 남겨진 낙서나 흔적들을 보존해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책 수선은 그래서 낡은 책을 그저 새 책처럼 보이게 고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라고 한다.
그는 "책도 사람처럼 기억을 간직한다"며 "읽으면 그만인 사물이 아니라 추억을 간직하거나 새 기억을 심을 수 있는 물품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책 수선은 시간의 흐름으로 낡아버린 책처럼 흐트러진 기억의 조각을 주워 모아 다시 재조합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다시 만들어진 책을 보면서 소장자는 지나온 세월과 현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특별한 사연을 가진 망가진 책만이 수선 대상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삶의 지혜를 찾는 소중한 원천이 책이기에, 중고서적을 구매한 후 좋지 않은 부분을 발견하거나, 소장하던 책을 더 깨끗한 상태로 보존하고 싶은 경우 등에도 수선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 정갈한 마음가짐으로 독서를 즐길 수도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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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을 해서라도 간직하고 싶은 책을 용도와 쓰임에 맞게 재창조해주는, 책에 담긴 소중한 추억까지도 되살려주는 재영 책수선에 ‘인싸’들이 주목하는 것을 디지털 세대의 아날로그적 감성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이곳에서 일일이 수작업을 통해 만들어지는 각별한 기억의 조각들이 어떤 세상을 만들어갈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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